우봉 조희룡 ‘홍백매도’ 19세기, 종이에 그린 수묵담채화, 124x375.5cm /사진제공=일민문화재단
봄이다. 매화 철이다.
매화 그림이라 하면 스스로 ‘매화 늙은이’라는 뜻으로 ‘매수’라 호를 붙인 조희룡(1789~1866)이 으뜸이다. 매화를 그리다 흰머리가 됐다고 했을 만큼 매화를 좋아한 그는 ‘석우망년록’이라는 저서에서 매화에 몹시 빠져있음을 고백했다.
“나는 매화를 지나치게 좋아해서 잘 때는 내가 직접 그린 매화 병풍을 눕는 자리 주위에 둘러쳤고, 매화 시가 새겨진 벼루(梅花詩境硯)를 쓰고 매화 이름이 들어간 먹(梅花書屋藏煙)을 사용한다. 앞으로 매화 시 백 편을 지을 작정인데 시가 완성되면 내가 사는 곳에 매화백영루(梅花百詠樓)라고 편액을 걸어서 매화 좋아하는 마음을 한껏 드러내 갚을 생각이다. 하지만 시가 쉽게 지어지지 않아 괴롭게 읊조리다가 마른 입 적시려 매화 차를 마시곤 한다.”
하지만 매화를 사랑한 선비가 어디 조희룡뿐이었겠나. 세종의 손자였던 강양군 이정은 임종을 앞두고 매화 가지를 꺾어오라고 해 그 그윽한 향기 속에서 시를 짓다 숨을 거뒀고, 퇴계 이황의 마지막 유언은 매화 화분에 물을 주라는 것이었다. 김홍도는 끼니를 거를 정도로 가난한 와중에 그림값으로 매화 화분을 샀다. 매화를 찾아 아직 눈 덮인 산을 누비는 ‘탐매도’나 매화 가득한 숲 속에 아담한 집을 짓고 책 읽으며 지내는 ‘매화서옥도’는 선비들의 꿈이었다.
조희룡은 매화를 그릴 때 “한 줄기를 치더라도 용을 움켜잡고 범을 잡아 맨 듯해야 하며, 꽃 한 송이를 그려 넣더라도 하늘의 선녀와 같아야 한다”고 했다. 어디 보자. 굵은 매화 둥치가 승천하는 용의 기상을 닮았다. 선녀들이 내려앉은 양 붉은 홍매와 흰 백매가 흐드러지게 피었다. 화첩 하나로는 어림없다. 벽 하나를 채울 크기인 8폭(약 375㎝)에 그렸건만 어디 한군데 힘 달린 곳이란 없다. 조희룡은 이렇게 펼친 병풍 전체를 하나의 매화로 장악하는 그림을 처음 시도했다. 그는 자신의 이 매화도를 ‘여섯 자 크기 대작’이라는 뜻으로 장륙매화(丈六梅花)라 불렀다.
백화만발한 매화에는 기교로 꾸민 장식적 화려함이 아니라 기개로 떠받들어진 위엄이 번뜩인다. 힘있게 휘어진 둥치가 그렇고 날카롭게 낭창낭창 치고 오른 가지가 그렇다. 매화의 암향(暗香)이 알싸하게 퍼진다. 나부끼는 백매 꽃잎은 따뜻한 눈발을 닮았다. 실제로 눈 속에서도 꽃을 피우는 매화다. 수줍게 얼굴 붉힌 홍매를 여기저기 배치에 화폭에 활력을 더했다. 너무나 우아해서 꺾을 엄두도 낼 수 없는 매화꽃이다. 그림 앞쪽의 큼직한 바위가 덩달아 꿈틀댈 것 같다. 기굴한 매화는 잔가지 끄트머리까지 당당하다. 기어이 이 겨울을 밀어 내리라 팔 걷어붙이는 듯하다.
이 그림을 그릴 당시 조희룡의 처지가 그랬다. 도봉산 자락에서 태어나 서울에서 자란 그는 경제적 여유를 배경으로 한 신흥지식층인 중인들의 여항(閭巷)문화를 이끈 대표작가였다. 서체와 난 그림은 추사 김정희에게 배웠으나 매화나 대나무 그림에 있어서는 자신만의 예술세계를 펼쳐 나갔다. 아주 독창적인 화가였고 특히 매화 그림을 많이 그려 현재까지 30여 점이나 전한다.
조희룡 ‘매화서옥도’ 수묵담채화, 130x32cm /사진제공=국립중앙박물관
비교적 순탄했던 그가 62세이던 해에 추사의 심복으로 지목됐다. 졸지에 귀양길로 내몰려 1년7개월을 보냈다. 유배지는 전남 신안의 외딴 섬 임자도. 집 주변은 대나무와 돌이 에워쌌고, 집 밖으로 나서봐야 바다뿐인 곳이었다. 작은 오두막집을 세 칸으로 나눠 하나는 잠자는 방, 하나는 부엌으로 쓰고 제일 좋은 자리는 그림 그리는 곳으로 만들었다. 거기서 매화·난초·대나무를 쉬지 않고 그리며 울분을 달랬다. 외롭고 곤궁하던 어느 날 편지 한 장이 날아들었다. 연배는 한참 아래이나 규장각 서리로 재산을 제법 모은 나기(1828~1874)가 매화병풍을 위한 그림을 부탁했다. 조희룡을 돕겠다는 뜻이었다. 매화도인은 오랜만에 만난 벗과 매화주 한 잔 들이켜는 것만큼이나 기뻤다.
이 같은 ‘홍백매도’의 제작 사연은 김정희의 역작 ‘세한도’와 닮았다. 추사는 귀양살이 중인 자신을 잊지 않고 귀한 책을 챙겨 보낸 제자에게 감동했고, 꾸밈없는 초가집 주변을 늘 푸르게 지키는 소나무·잣나무를 그린 ‘세한도’로 그 고마운 마음을 전했다. 몸도 마음도 평온하지 않았던 탓인지 이 ‘홍백매도’는 조희룡의 다른 매화 그림과 사뭇 다르다.
“바다 돌 움푹 패인 곳을 벼루 삼아 먹을 갈고 시골 노인의 서푼짜리 개털로 만든 낡은 큰 붓을 빌려 붉고 흰 1장6척 크기의 매화를 그려냈다. … 철추가 매달린 듯 무거운 열 손가락을 억지로 놀려서 바닷가 산은 짙푸르고 하늘에서 휙휙 세찬 바람 불어오는 곳에서 그려낸 것이 이 그림이다.”
빈한한 삶이라고 해서 그림을 그리지 못할 까닭 없다. 싸구려 개털 붓끝에서 명품이 탄생했다. 국립중앙박물관의 이수미 학예연구실 미술부장은 “매화를 그린다는 것을 넘어 툭툭 찍은 붓질 그 자체가 그대로 그림이 됐다”면서 “서양에 빗대자면 표현주의 미술이자 액션페인팅이라 할 만한 작품으로 종전 문인화에서는 볼 수 없던 예술가의 희열과 자기 분출을 드러낸다”고 찬사를 보냈다.
조선 중기까지의 매화도 절제된 구도에 간결한 필치로 매화의 굳건함을 강조했는데 조희룡이 그 방향을 바꿔놓았다. 마치 늙은 매화의 굵은 둥치가 틀리듯. 그는 청과 교류하며 새로운 화법을 받아들였지만 장식성에 치우치지 않았다. 가지와 구성은 복잡하게, 꽃은 더 많게 그렸다. 문기(文氣) 충만한 문인화나 규칙과 법도에 충실한 화원화풍과는 전혀 달랐다. 이처럼 매화 가지가 양쪽으로 뻗어 올라가는 양식은 이후 유숙, 허련, 장승업 등 후대 작가들에게 영향을 미쳤다.
아몬드 나무를 그린 열정의 화가 반 고흐가 조선에 태어났으면 이랬으려나. 조희룡은 그림에 몰입하는 자신의 예술관을 이렇게 적었다. “고정된 방식이 한 번 변하여 엄청난 즐거움에 이르고 그 즐거움이 변하면 취함에 이르며 취함이 변해 글씨에 이르고 글씨가 변해 그림에 이르니, 그림이 변해 돌에 이르고 난에 이르고 광도난말(狂塗亂抹·마구 바르고 어지러이 칠하는 것)에 이르고 권태에 이르고 잠에 이르고 꿈에 이르고 나비가 되어 훨훨 나는 데 이른다.”
불끈거리는 봄 기운을 주체할 수 없는, 미칠 것 같은 봄날이 시작됐다. 하지만 춘기가 흘러 넘치면 그 또한 화를 부른다. 그림처럼 딱 이만큼이면 좋겠다.
/조상인기자 ccsi@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