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은이 지난 5일 대방건설과의 후원 계약 조인식장에 마련된 자신의 등신대와 함께 포즈를 취하고 있다. 이정은은 팬들이 해준 ‘믿고 보는 선수’라는 말이 지금껏 들어본 최고의 찬사라고 했다. /권욱기자
‘김효주도 가고, 전인지도 가고, 박성현도 가고….’
지난 2016년 말 한국여자프로골프(KLPGA) 투어는 시름에 잠겼다. 2~3년 새 걸출한 스타들이 잇달아 미국여자프로골프(LPGA) 투어 무대로 진출하면서 흥행 동력을 잃을 수도 있을 것이라는 우려 때문이었다. 프로 무대에서 스타의 부재는 흥행 부진을 의미하고 이는 스폰서십의 유출과 대회 감소로 이어진다. 투어의 위축이다. 하지만 2017시즌이 열리면서 걱정은 희망으로 바뀌었다. 또 다른 별들이 뜨고 예상치 못한 대결 구도가 만들어져 팬들을 불러모았다. 그 중심에 바로 이정은(22·대방건설)이 있었다.
이정은으로 말하자면 박세리·신지애·박인비 등 한국 여자골프 ‘지존’의 계보를 이을 재목이다. 2014년 아마추어 국가상비군, 2015년 국가대표로 발탁됐고 2015광주하계유니버시아드대회 골프 개인전과 단체전에서 2관왕을 차지했다. 2016년 KLPGA 정규투어에 진출한 그는 신인상을 수상한 데 이어 지난해 4승을 올려 다승왕과 상금왕, 대상, 평균타수 1위, 인기상, 기자단 선정 베스트플레이어상 등 상이란 상은 모조리 휩쓸었다. 선수 중에 동명이인이 많아 이정은의 이름 뒤에 꼬리표처럼 달린 ‘6’이라는 숫자는 이정은의 활약과 함께 ‘러키 식스(6)’이라는 신조어에 활용된 데 이어 ‘핫식스’라는 별명으로 발전했다. 팬들로부터 ‘믿고 보는 선수’ ‘대세녀’ 같은 최고의 찬사도 들었다.
이번에 이정은을 만난 것은 대방건설과 후원 계약을 맺은 날이었다. 계약 기간에 자세한 계약 내용은 공개되지 않았지만 관련 업계에서는 연 8억원이 보장되고 성적에 따른 추가 인센티브 조건이 걸린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KLPGA 투어 역대 최고 수준의 조건이다. 새 시즌 출발을 앞두고 날개를 단 셈이다.
이정은에게 투어 3년 차의 키워드를 말해달라고 했다. “첫해가 도전, 두 번째였던 지난해가 환희라고 한다면 올해는 ‘기다림’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2년 동안 느낀 게 욕심이나 부담감을 갖고 기회나 우승을 쫓아가려 하면 잡히지 않는다는 사실이에요.” 그는 “대회마다 차근차근 경기하면서 기회가 올 때를 기다릴 줄 아는 선수가 우승한다고 믿는다”고 말했다.
주목받는 선수로 ‘신분’이 바뀐 만큼 부담감과 조바심이 클 법도 하지만 이정은은 여전히 차분했다. 2016년 초 처음 얘기를 나눠봤을 때 ‘어리지만 속이 꽉 찬 소녀’라고 느꼈던 기억을 다시 떠오르게 하는 대목이었다.
투어의 또래 선수들과 다름없는 20대 초반의 이정은은 남다른 강인함을 가졌다. 이제는 많이 알려진 사실이지만 덤프트럭 기사로 일하던 이정은의 아버지 이정호(54)씨는 이정은이 네 살 때 큰 교통사고를 당했고 그로 인해 하반신이 마비됐다. 아버지는 장애인용 승합차를 손수 운전해 외동딸을 뒷바라지했다. 대회장에서 휠체어를 타고 묵묵히 경기를 지켜보고 있는 남자를 발견했다면 그가 아버지 이씨다. 이정은은 “골프가 잘 안 될 때는 너무 힘들어서 그만두고 싶기도 한데 휠체어에 탄 아버지 생각만 하면 정신이 든다. 골프에 집중하고 성적을 내는 게 효도라고 생각한다”고 했다. 초등학교 2학년 때 아버지 권유로 시작한 골프를 5학년 때 중단하기도 했었다. 휠체어를 타고 연습장에 함께 다닌 아버지를 보며 ‘저렇게까지 골프를 해야 하나’라는 주변의 수군거림 때문이었다. 3년 동안 골프채를 잡지 않은 이정은은 ‘티칭(교습)이라도 하면 가정에 보탬이 될 수 있겠다’는 생각으로 중3 때 골프를 다시 시작했다. 일찍 철이 들었던 것이다. 2년 만인 고2 때 전국대회에서 우승하며 마음을 굳혔고 이후로는 엘리트 코스를 밟아 나갔다. 2016년 모은 상금(약 2억5,000만원)으로는 전세자금을 보태고 아버지에게 전동 휠체어도 선물했다.
KLPGA 이정은 /권욱기자
본격적으로 골프를 다시 하게 된 이정은에게는 잊지 못할 스승이 있다. 2013년 골프 국가대표 감독을 지낸 김봉주(58) 경기도골프협회장이다. 김 회장은 이정은이 고향인 전남 순천에서 골프를 배우는 데 한계가 있다고 보고 경기 용인의 아카데미에 장학생으로 소개를 해줬다. 김 회장은 “인성이 좋고 심지도 굳어 보여 재목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고 회상한다. 이정은 역시 누군가에 도움이 되려고 한다. 8명의 어린 골프 꿈나무들을 후원한다. 올해 출전하는 모든 대회의 골프장 이용료를 지원하기로 했다.이정은은 지난해까지 “아버지가 따라다니시기 불편할까 봐서” 누구나 바라는 미국 진출의 꿈을 접었었다. 하지만 최근 계획을 수정하는 중이다. 2020도쿄올림픽이라는 변수 때문이다. “골프선수로서 최고의 목표는 올림픽 출전입니다. 국가당 최다 4명까지로 제한된 올림픽 출전권을 따려면 (세계랭킹 포인트가 높은) 미국 대회에 많이 출전해 랭킹을 올려야 하거든요.” 지난해 KLPGA 투어 성적으로 올해 미국 LPGA 투어 5대 메이저대회에 초청 출전할 수 있는 그는 국내를 주 무대로 하면서 미국 대회에서 좋은 성적을 내 내년 출전권을 확보하겠다는 계획으로 보인다. 지난해 LPGA 투어 신인왕과 올해의 선수를 석권한 박성현(25·KEB하나은행)이 이런 방식으로 미국에 진출했었다. 이정은은 “2016리우올림픽에서 (박)인비 언니는 정말 대단한 일을 했다”며 “골프 경기는 변수가 너무나 많은데 꼭 필요한 대회에서, 그것도 100년도 넘는 세월 만에 올림픽에 부활한 골프 경기에서 금메달을 따냈다는 건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어려운 일”이라고 경의를 표했다. 유니버시아드에 국가대표로 참가한 경험이 있는 그는 태극마크의 무게감과 성과에 따른 성취감을 잘 알고 있다.
올해 목표에 대해서는 “꼭 집을 수는 없고 승수를 쌓아 나가는 게 기쁨일 것”이라고 답했다. “해외 대회 출전이 늘어나 상금왕 2연패는 쉽지 않을 것”이라면서도 “지난해 거둔 4승 중 한 대회라도 타이틀 방어를 하는 것, 그리고 아직 해보지 못한 메이저대회 우승”까지 목표 리스트에 올려놓았다. 겨우내 태국에서 훈련으로 구슬땀을 흘린 그는 “변화보다는 지난해의 좋았던 스윙과 리듬을 유지하려고 노력했다”면서 “근력 운동 중심으로 체력을 키웠고 기술적으로는 바람 속 플레이를 비롯한 트러블샷에 대비해 연습했다”고 설명했다.
이제 도전을 받는 입장이 된 이정은의 경계대상은 누구이고 보완점은 뭘까. 우문에 현답을 내놓았다. “골프는 변수가 많은 운동이라 모든 선수가 라이벌이고 경쟁자이기 때문에 누구를 의식하기보다는 제 플레이를 차분하게 하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보완해야 할 점은 기량보다 마음가짐입니다. ‘보통 선수’에서 이제 주목을 받으며 경기에 나서는 선수가 됐잖아요. 달라진 환경에 적응해 부담 갖지 않고 차분함을 잃지 말아야 할 것 같아요.”
9일 베트남에서 개막한 KLPGA 투어 한국투자증권 챔피언십에 출전한 이정은은 국내에서 2주가량 훈련과 휴식을 병행하고 이달 말 열리는 미국 LPGA 투어 시즌 첫 메이저대회 ANA 인스퍼레이션에 나간 뒤로는 오는 4월5일 롯데렌터카 여자오픈부터 KLPGA 투어에 전념하면서 틈틈이 해외 대회에 나갈 예정이다.
/박민영기자 mypark@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