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찰팀24/7]"횡단보도 절반도 못갔는데 깜박 깜박…" 노인을 위한 도로가 없다

<노인 보행자 사망 1위 대한민국>
도로 곳곳 아찔한 상황 연출…하루 2.5명 안타까운 죽음
"차 없을때 가면 되지" "차가 피해 가" 안전불감증도 한몫
경찰 "보행신호 시간 연장하고 중앙차로분리대도 설치"


“절반밖에 못 건넜는데 녹색불이 너무 빨리 꺼져. 다리도 아프고 바로 앞인데 언제 기다리나. 차들이 알아서 서니까 걱정 안 해도 돼.”

지난 11일 오전 서울 동대문구 청량리시장 인근의 왕복 8차선 도로. 70대 초반으로 보이는 한 노인이 도로를 느릿느릿한 걸음으로 건너고 있었다. 횡단보도를 한참 벗어나 사선으로 도로를 가로지르고 있었다. 인근 횡단보도에는 이미 녹색불이 꺼진 상태. 건너편 주행신호를 받은 차량이 노인을 맞닥뜨리면서 아찔한 상황이 연출됐다.

청량리시장 인근에는 대형병원과 시장·기차역이 모여 있어 평소에도 노인들이 많이 찾는다. 이날 서울경제신문 취재진이 오전10시부터 한 시간 동안 눈으로 확인한 무단횡단자만 19명에 달했다. 대부분 60대 이상의 노인들이었다. 가까운 곳에 횡단보도가 있지만 흰색 선을 한참 벗어나 도로를 횡단하거나 보행자 신호등이 꺼져 있는데도 건너는 경우가 많았다. 이곳은 지난해에만 3건의 보행자 사망사고, 15건의 보행자 부상사고가 발생한 곳이다. 이달 7일에도 60대 여성이 무단횡단을 하다 차량에 치여 현장에서 사망했다.


같은 시각 노인들이 많이 모이는 대표적인 장소인 종로3가 탑골공원 일대도 상황은 비슷했다. 차량이 적은 주말 오전이라 차들의 주행속도는 평일보다 빠른 편이었다. 하지만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무단횡단하는 노인들이 심심치 않게 목격됐다. 8차로를 한 번에 건너기 힘든 노인들은 버스중앙차로까지 절반을 건넌 후 잠시 쉬었다가 다시 도로를 건너기도 했다. 종로3가에서 노점상을 운영하는 박모씨는 “옛날에는 8차로를 한 번에 건널 엄두를 내지 못했는데 버스전용차로가 생기면서 도로 한가운데 정류장이 생기다 보니 무단횡단하는 사람들이 크게 늘었다”면서 “무단횡단을 하다 위험에 처한 노인들은 오히려 차량 운전자를 탓하기도 한다”고 전했다.

국내에서 발생하는 보행자 사망사고 중 절반가량은 65세 이상의 노인이 피해자다. 경찰청에 따르면 2017년 전체 보행자 사망사고 1,675건 가운데 노인 보행자 사망자는 총 906명으로 54.08%에 달했다. 하루에 차에 치여 숨지는 노인이 2.5명꼴이던 셈이다. 국내 노인 보행자 사망사고는 세계적으로도 높은 수준이다. 도로교통공단에 따르면 2015년 우리나라 65세 이상 노인 인구 10만명당 보행 중 사망자 수는 13.7명으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가장 많았다. 일본의 3배, 미국의 6배로 OECD 회원국 평균인 3.0명의 4.6배 수준이다. 경찰의 한 관계자는 “지난해의 경우 전체 보행자 사망사고 중 33.5%에 달하는 562건이 무단횡단을 하다 발생했을 정도로 국민 전체의 전반적인 도로교통안전 의식이 부족하다”며 “특히 노인들의 경우 위험한 상황에서 재빠르게 대처하기 어려운데도 교통신호를 제대로 지키지 않는 경우가 많아 안타까운 죽음이 끊이지 않고 있다”고 지적했다.

실제 취재진이 현장에서 만난 노인 중 상당수는 “횡단보도에서 사고가 나면 무조건 차량 운전자의 잘못이기 때문에 차가 사람을 피해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횡단보도에서는 빨간불일 때 사고가 나도 가해 운전자에게 12대 중과실이 적용된다. 하지만 인지능력이 떨어지는 노인들은 차가 와도 피하지 못하고 그대로 맞닥뜨리는 경우가 많아 심각한 부상이나 사망으로 이어질 위험이 높다.

경찰은 이 같은 노인 보행자 사고를 줄이기 위해 대책 마련에 나섰다. 우선 서울 지역부터 사고가 잦은 지역의 횡단보도 보행신호 시간을 최대 3초까지 늘리기로 했다. 또 노인 보행자가 많은 전통시장과 복지시설 주변의 보행신호 시간을 어린이 보호구역 수준으로 늘리기로 했다. 일반 신호는 보행자가 1초당 1m를 걷는 데 반해 어린이 보호구역은 1초당 0.8m를 기준으로 계산돼 신호가 더 길다. 노약자 통행이 잦은 복지시설이나 학교 주변 교차로에서는 모든 횡단보도에 보행신호를 동시 부여해 모든 차량이 정지한 후에 보행자가 건널 수 있도록 할 방침이다. 또 중앙차로분리대와 무단횡단 금지표지판도 확대 설치하기로 했다.

경찰 관계자는 “노인들이 불편한 몸으로 무거운 짐을 들고 단거리로 움직이려다 대형 사고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다”며 “정책적인 노력과 함께 주변에서 무단횡단을 목격하면 적극적으로 만류하는 등의 노력이 필요하다”고 당부했다.
/최성욱·유동현·유민호기자 secret@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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