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상인의 예(藝)-<53>박이소 '당신의 밝은 미래']허름한 조명기구가 만든 환한 빛...'그늘진 세상'을 비추다

너무 밝아서 비현실적인 9개의 조명
'결코 밝지않은 현실' 비틀어 보여줘
커피·콜라·간장으로 그린 '쓰리스타쇼'
기호 등 문화적 정체성 미묘하게 반영
2003·2005년 베니스비엔날레 참여
47세에 요절...'우리는 행복해요'가 마지막 유작

박이소 ‘당신의 밝은 미래’ 2002년작, 9개의 전기램프와 나무·전선으로 이뤄진 가변설치작품,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과천=송은석기자

아, 밝다. 너무 밝다. 미술관 전시장에서 조명이 비추는 곳에는 작품이 있기 마련이다. 하지만 이 조명 앞에는 아무것도 없다. 막힌 벽뿐이다. 박이소(1957~2004)의 ‘당신의 밝은 미래’는 조명 자체가 작품이다. 아니, 정확히는 공사장 등지에서 쓰이는 야외용 전등과 이를 얼기설기 지탱하고 있는 각목들로 이뤄진 이 허름하고 연약한 조명기구와 함께 빛이 비치는 벽구석까지가 작품이다. 혹시 가까운 곳에 음향기기가 있다면 존 레논(1940~1980)의 ‘이매진(Imagine)’을 틀어놓고 이 작품을 감상하길 권한다. 잠시 머리를 열고 생각을 환기시킬 필요가 있으니.

‘당신의 밝은 미래’는 희망적인 제목만큼이나 당당하게 당신의 미래를 비춘다. 봐라, 이 얼마나 밝은가. 그러나 너무도 밝아서 비현실적으로 보이는 빛은 아무것도 없는, 허상으로 느껴지고 만다. 게다가 빛이 쏟아지는 곳은 막다른 곳, 끝까지 내몰린 벽이라 피할 곳도 숨을 곳도 없다. 9개나 되는, 이렇게 많은 빛이 나를 비추는데 정작 나는 무엇을 보여줘야 한단 말인가. 빛을 비춰준다는 것은 그만큼 어둡다는, 그래서 빛이 필요하다는 것을 뜻할지도 모른다. 결국 이 작품은 ‘결코 밝지않은 현실’을 비틀어 보여준다. 마침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이 ‘균열’이라는 제목으로 소장품전(다음달 29일까지)을 열고 있어 이 작품을 직접 만날 수 있다.

박이소 ‘쓰리 스타 쇼(Three Star Show)’ 1994년작, 종이에 커피·코카콜라·간장으로 그린 작품.

박이소 작품의 첫인상은 싱겁다. 조금 나른하기도 하다. 그래서 더 지켜보고 작품 주변을 샅샅이 살필 필요가 있는데 오래 머물수록 심란하며 급기야 웃음이 나기도 한다. ‘쓰리 스타 쇼(Three Star Show)’도 그렇다. 종이 위에, 별이 3개. 심지어 흐릿하며 색도 없다. 작가는 “1994년 여름, 흰 종이 위에 각각 커피, 콜라, 간장을 사용해 세 개의 별을 나란히 그렸다”. 세 가지 재료의 공통점은 갈색 액체라는 것. 하지만 이들은 미묘하게 문화적 정체성을 반영한다. 간장은 한국 식(食)문화를 상징한다. 콜라는, 특히 작가가 그림에 사용한 코카콜라는 자본주의와 신자유주의를 두루 건드린다. 인스턴트 커피를 생활필수품으로 여기는 사람부터 밥보다 더 비싼 커피를 마시는 사람들까지 천차만별이지만 커피에는 “나는 구별할 수 있고 너희들은 구별할 수 없음”을 과시하는 취향과 기호, 계급 논리가 복잡하게 작용한다. 그리고 별은 밤하늘에서도 반짝이지만 무대 위에서도, 용감한 장군의 어깨 위에서도 반짝이며 ‘별이 세 개’라는 말은 전과 3범이라는 뜻의 은어로도 통한다. 그러니 나란히 놓인 희끄무레한 별 세 개는 “평화적 공존의 정치상황이 갈등 없음을 뜻하는 것이 아니듯, 이 그림은 아슬아슬하게 공존하고 있는 상황에 대한, 각 별의 비슷함과 서로 다름에 대한 객관적인 보고서 제출”인 것이다.

박이소의 작품이 입 떡 벌어지는 감탄이나 눈 휘둥그레지는 충격을 끌어내는 일은 별로 없다. 다만 ‘하아’ 새어나가는 탄식을 감출 수 없게 하는, 뒤돌아 피식 웃게 만드는 씁쓸한 유머와 따뜻한 위로를 품고 있다. 다시 ‘당신의 밝은 미래’를 보자. 어쩌면 우리는 밝은 미래를 기어이 얻어내기 위해서라도 지금의 고통과 수치를 감내하며 악행과 치부를 비추어 밝혀내야 한다고 외치는 것 같다. 한두 번 보고는 서너 번 생각하게 만드는 것, 그게 박이소다.


박이소 ‘팔방미인’ /사진제공=국립현대미술관

1957년 부산에서 태어났고 1981년 홍익대 회화과를 졸업한 그는 미국 유학길에 올라 프랫인스티튜트 대학원 회화과에서 공부했다. 그 후 딱 10년간 본명 박철호를 버리고 ‘박모’라는 예명으로 뉴욕에서 지냈다. 이름을 감출 때 사용하는 ‘모’를 이름으로, 그는 자신을 버리고 시작했다. 어차피 뉴욕 주류미술계에서 발음하기도 어려운 동양인의 이름은 ‘없는 것’과 마찬가지였을까. 유명을 버리고 무명을 택했다. 1984년 가을 박이소는 ‘추수감사절 이후 박모의 단식’이라는 퍼포먼스를 벌인다. 사흘을 꼬박 굶고는 11월 25일 정오에 미리 만들어둔 가마솥을 줄에 매달아 목에 걸고 끌고가기 시작했다. 맨해튼 쪽으로 걸어가 브루클린 다리를 건넜다. 이름을 지우고 굶기를 실천했으니 승려의 수행과 다를 바 없었다. 백남준이 바이올린을 끌고 다니며 서양문화의 전통을 파괴하는 퍼포먼스를 벌일 때는 떠들썩하게 보는 이라도 많았지만, 굶주린 몸으로 솥을 끄는 그를 본 사람은 별로 없었다. 그저 조용한 선포식이었다.

곧 그는 뉴욕 브루클린 북부에 있는 그린포인터지역에 약 28평 정도의 작은 공간을 확보했다. 간판 대신 하얀색 락카로 ‘마이너 인저리(Minor Injury)’라는 이름을 휘갈겨 썼다. 경미한 상처 또는 소수의 상흔 정도로 번역되는 곳. 1985년 9월 개관한 관장 박이소의 목적은 “어떤 이유에서든 뉴욕의 현존하는 시스템에 순응하지 않는 작가들에게 대안 공간시설을 제공하는 것”이었다. 그는 “인종적, 문화적, 정치적, 사회적으로 소수에 속하거나 이와 연관된 관심을 작품에 반영하는 작가들”과 “분쟁지역 국가나 개발 도상국으로부터 최근에 이민 온 작가들”을 특별히 환대했다. 백인 주류의 뉴욕 문화계에서 소외된 이들을 위한 비영리 대안공간이었다. 서로를 위한 배려이기도 했다. 현지 언론에도 소개되며 상당히 눈길끄는 전시공간이 됐지만 박모로 활동하던 그는 스스로 설립자이기에 정작 자기 작품은 전시한 적 없었다.

박이소 ‘잡초도 자란다’ /사진제공=이소사랑방

민화 ‘책가도’나 겸재의 ‘총석정’ 등 전통에 기반 둔 기발한 그림들과 선비의 묵란(墨蘭)을 패러디 한 ‘그냥 풀’, 민초를 대변하는 ‘잡초도 자란다’ 등이 뉴욕시기의 작품들이다. 박이소는 우리 전통에 대한 관심과 자부심이 컸지만 그것이 외국의 눈에는 제대로 보이지 않음을 자각하고는 그 점을 다시 꼬아 보여줬다. 한국적 실정을 반영한 그의 ‘프로젝트DMZ’는 웃기면서 눈물난다. 딱 30년 전인 1988년의 작품이다. 작가는 ‘DMZ 해제를 위한 실용적인 제안’이라는 제목의 부적을 만든다. 그런 다음 이를 남한과 북한을 포함해 미국·소련·일본·중국 등 총 여섯 나라에 보냈다. 부적을 보내면서 이를 태우고 그 재를 물에 섞어 마시기를 주문했다. 그리고 “이 의식을 진심으로 행한다면” 일주일이나 이주일 안으로 남북통일이 이뤄질 것이라고 했다. 그 부적이 당시 각국에, 정확히 누구에게 전달됐는지는 알 수 없으나 한반도와 주변 강대국 중 그 누구도 이 지시를 따르지 않았다. 그리고 지루한 긴장관계는 북미와 남북정상회담을 앞둔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박이소 ‘드넓은 세상’ 2003년작, 캔버스에 아크릴로 그린 그림과 조명장치·종이라벨 등으로 이뤄진 설치작품.

미국 생활 10년을 정리하고 귀국해 ‘박이소’로 살기 시작한 그는 교육자로, 이론가로, 그리고 작가로서 전성기를 달린다. 2002년에 에르메스미술상을 수상했고 2003년에는 김홍희 커미셔너가 이끈 베니스비엔날레 한국관 작가로, 뒤이어 2005년에는 김선정 커미셔너가 이끄는 베니스비엔날레 한국관 전시에 연거푸 참여했다.

2003년 제작한 ‘드넓은 세상(Wide World Wide)’는 하늘색 캔버스 위에 세계 지도가 그려져 있고 아라라쿠아라, 누나추악, 부굴마, 빌랄판도 등 “난생처음 들어보는 도시들의 이름이 서툴게” 적혀 있다. 이 앞을 5개의 전등이 희미하게 비춘다. 살면서 한번도 불러볼 일 없는 낯선 작은 도시의 이름 앞에서 내가 사는 이곳 말고도 또 다른 세계가 있음을 자각하게 된다. 박이소는 굳이 그런 곳들을 찾으려 애쓴 작가였다.

이듬해 부산비엔날레 출품작을 준비하던 박이소는 4월26일 갑작스레 세상을 떠난다. 비엔날레 측에 미리 계획안을 전달해 둔 ‘우리는 행복해요’가 마지막 유작이 됐다. 우연히 영상을 통해 접한 북한 모습에서 회색빛 건물 위에 커다랗게 적힌 ‘우리는 행복해요’라는 선전문구에서 착안한 것이라 했다. 너무나 커서 가까이서는 무슨 글자를 쓴 것인지 알아볼 수 없을 뿐더러 멀리서도 허망하게 읽히는 문장이지만 그렇게 그는 우리의 행복을 빌어주고 떠났다. 마치 ‘당신의 밝은 미래’처럼. 이 유작은 당시 부산에 닥친 태풍 때문에 개막식 직전에 한번 부서져 보수를 거쳤고, 전시 막판에 북상한 또 다른 태풍에 의해 산산이 부서지고 말았다. 사막에 불시착한 어린왕자처럼 혼란스러운 와중에도 서툰 걸음을 멈추지 않았던 박이소. 어쩌면 그는 꺼지지 않는 빛을 던지기 위해 ‘미래에서 온 사람’이 아니었을까.
/조상인기자 ccsi@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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