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 길 먼 K아트]작품 색조만 교묘히 바꿔 유통…표절에 얼룩진 한국미술 자화상

< 상 > 미술 저작권 '관리 사각지대'
유족·재단 등이 저작권 개별적 관리로 수익화 미미
앤디 워홀 250억 벌때 천경자는 375만원 벌어 대조
4차산업혁명시대 지재권 중요…미술품 DB축적 시급



하태임 ‘통로 No.171004’(왼쪽 사진)과 추상화가 하태임의 작품 이미지를 작가 동의없이 무단 도용한 동대문 티셔츠. /사진제공=하태임작가

추상화가 하태임(45)은 최근 지인으로부터 자신의 작품 이미지를 그대로 도용한 티셔츠가 동대문 상가에 걸려 있다는 사진 제보를 받고 망연자실했다. 해당 작품은 지난해 가나아트센터 개인전 때 전시된 후 언론과 잡지 등을 통해 다수 소개된 대표작이었다. 작가는 다음날 해당 상가를 찾아갔고 티셔츠 외에도 작품의 색조·구성 등을 조금씩 교묘하게 바꿔 사용한 스카프와 원단 등 ‘동의 없이 제작된’ 다수의 제품들을 발견한 후 법적 대응을 고심하고 있다. ‘컬러밴드’ ‘색띠’ 등의 별명이 붙은 그의 작품들은 에어컨·컴퓨터·공기청정기 등 가전제품과 컬래버레이션될 정도로 대중적 인지도가 높다.

36년 전 시작한 화랑미술제를 필두로 연간 수십 건의 크고 작은 아트페어가 열리고 지난 1998년 서울옥션과 뒤이은 케이옥션의 출범으로 미술품 공개시장인 경매가 활성화되는 등 한국 미술시장이 체계를 다져가는 중이나 여전히 곳곳에 작가 및 미술품 구매자의 권리 사각지대가 포착된다.

그중 대표적인 것이 하태임 작가의 사례와 같은 ‘저작권’ 문제다. 지적재산권의 일종인 저작권은 작가의 저작물에 대한 배타적·독점적 권리로 문학·음악·영상·미술·건축·사진·게임·컴퓨터프로그램 등 다양한 창작물에 적용된다.


그러나 미술품 관련 저작권은 생존 작가나 작고 작가의 유족 및 재단 등이 개별적으로 관리하고 있어 파악이 어렵다. 아직 국내 미술시장의 산업화가 요원하고 저작권 수익 규모가 미미한 것도 원인 중 하나다. 국제저작권연맹(CISAC)이 지난해 발표한 미술품 저작권료에 따르면 가장 많이 징수한 독일은 연간 5,700만유로(약 760억원)를 거둬들인 데 반해 우리나라는 집계 시스템 자체가 없다.

국내 미술가 중 저작권료가 가장 비싼 것으로 알려진 김환기의 경우 상업적 사용 여부와 인쇄 부수에 따라 차등 적용되지만 “달력을 만들기 위해 이미지 12장을 사용하려면 1,000만원 이상은 저작권료로 지불해야 한다”는 것이 업계 관계자의 전언이지만 환기재단 측은 “저작권료 수입은 운영비의 5% 미만으로 미미하다”고 밝힐 정도다. 미국의 앤디워홀재단이 연간 250억원 정도의 수익을 거두는 것과 대조적이다. 서울시에 저작권을 기증한 천경자의 경우 공공 이용을 배려해 저작권료를 낮게 책정하고 상당 부문 무상 이용도 가능해 지난해 저작권 수입은 375만원에 그쳤다.

무엇보다도 법적으로 저작권을 판단하는 일이 쉽지 않다. 지난달 25일 열린 평창동계올림픽 폐회식 무대에서 한옥 지붕을 겹겹이 쌓아올린 발광다이오드(LED) 작품 ‘기원의 탑’이 선보이자 설치미술가 백승호는 자신의 작품과 흡사하다며 저작권 침해를 주장했다. 10년 가까이 선보여온 백 작가의 작품은 탑과 한옥 등에서 기둥과 벽을 없애고 지붕의 골조만 겹치게 한 형태라 외견상 올림픽 폐회식 조형물과 상당히 유사하다. 하지만 미술계 내에서도 이들이 ‘형식상 비슷해 보인다’는 표절 입장과 ‘전통문화를 활용해 떠올릴 수 있는 아이디어’라는 식으로 의견이 갈린다. 이처럼 현대미술에서는 패러디와 오마주 등을 명분으로 특정 작가의 핵심 아이디어가 변형돼 사용되는 경우도 잦은 편이다.

지적재산권 분야의 전문가인 임상혁 법무법인 세종 변호사는 “저작권법에서 보호 대상으로 하는 ‘창작성’은 ‘작가의 개성’을 느낄 수 있다면 보호 대상으로 인정하고 있으나 ‘추상미술’과 ‘개념미술’의 경우 어느 정도까지 보호 대상으로 삼아야 하는지가 저작권법의 숙제이기도 하다”면서 “다른 작가의 작품에서 영감을 받아 이를 응용한 새로운 작품을 만드는 것은 헌법상 표현의 자유 혹은 예술의 자유에 의해 보호되는 부분”이라고 설명했다. 임 변호사는 “창작 분야의 비전문가인 판사가 판단하는 것이 과연 정당한 결론이라고 볼 수 있는지도 의문이기에 표절 문제가 발생했을 때 해당 분야 전문가들이 집단적으로 모여서 토론하고 의견을 축적하는 것이 필요하다”면서 “이런 과정들이 누적돼 업계에서 수용 가능한 기준이 세워지게 하는 것이 유용하다”고 조언했다.

미술품 저작권에 대한 관리 소홀은 자칫 지식 산업과 4차 산업혁명 시대의 경쟁력을 떨어뜨릴 수 있다. 양정무 한국예술종합학교 미술원 교수는 “작가 사후 70년이 지나면 저작권이 소멸하지만 저작권이 유효한 근현대미술가의 경우 미술 교과서 한 권을 만드는 데 몇천만원씩 저작권료가 들 정도로 저작권 시장은 파악되지 못했을 뿐 어마어마하다”고 말했다. 특히 선진국이 선점한 지적재산권 분야는 해외 현대미술품은 이미지 사용이 엄격하게 관리되는 데 반해 후발주자인 우리는 체계도 잡혀 있지 않다. 양 교수는 “예전에 고속도로를 닦아 산업화의 기반을 만들었듯 이제는 콘텐츠에 해당하는 미술품 관련 데이터베이스를 축적해 저장하고 저작권도 관리할 수 있는 기구가 마련돼야 4차 산업혁명에도 대응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에 대한 대전제로 미술품 원작 관리와 거래 이력 관리의 필요성이 대두된다. 가장 큰 저작권 침해가 ‘위작’인 만큼 미술품 원본 관리가 출발점이라는 입장이다. 문화체육관광부 시각미술 분야의 한 관계자는 “진위 문제, 위작 유통도 발생하는 상황에서 저작권 관리는 요원하다”면서 “원작에 대한 미술품 거래 이력 등록 등 작품 관리 시스템 마련이 우선 돼야 저작권의 체계적인 활용이 가능할 것”이라고 말했다.
/조상인기자 ccsi@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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