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WHAT]신화도 무너뜨린 '정의의 호루라기'...내부고발자, 사회영웅으로 돌아오다

■기업 민낯 폭로하는 '딥스로트'


지난 2015년 4월, 타일러 슐츠는 추적을 피하기 위해 미리 사둔 선불폰을 꺼내 들었다. 몇 주 전 미국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인 링크드인을 통해 받은 월스트리트저널(WSJ) 기자의 전화번호를 누른 후 그는 잠시 눈을 감았다. 지난 1년간 힘들었던 시간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회사의 문제를 처음 발견하고 즉시 회사 창립자에게 e메일로 알렸지만 돌아온 것은 임원들과 회사에서 고용한 변호사들의 협박이었다. 익명으로 정부기관에 투서도 해봤지만 역시 소용이 없었다. 신호음이 가는 몇 초가 몇 시간처럼 느껴졌다. 얼마 후 슐츠는 구글 본사가 있는 캘리포니아주 마운틴뷰의 노천 맥주집에서 WSJ 기자와 만났다. 슐츠는 “비리는 회사 기밀이 될 수 없다”며 “법적 위협이나 괴롭힘에도 잘못된 행위에 대해 말할 수 있는 나의 권리를 지키겠다”고 기자에게 각오를 밝혔다. 이날 테라노스의 인턴 직원이었던 슐츠와 기자와의 만남은 실리콘밸리의 첫 여성 억만장자 벤처기업인이자 ‘여자 스티브 잡스’로 불리던 바이오벤처 기업 테라노스 창업주 엘리자베스 홈스가 ‘희대의 사기꾼’으로 전락하게 된 시초가 됐다.

테라노스·페북사태 등 내부고발이 단초

“조직 이익보다 사회 공동체 이익 우선”

만행 드러난 기업 대부분 막대한 벌금

신뢰 추락 → 매출감소 → 파산 이르기도




기업들을 흔들고 있는, 이른바 ‘딥스로트’로 불리는 내부고발자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내부고발자들의 폭로가 조직의 이익보다 사회 공동체의 이익을 더 우선시하는 공익적 행위로 평가받으면서 기업들이 숨기고 싶었던 민낯이 그대로 드러나고 있다. 이용자 5,000만명 이상의 개인정보가 영국 데이터 분석기업 ‘케임브리지애널리티카(CA)’에 불법 유출됐다는 의혹으로 창사 이래 최대 위기를 맞은 페이스북 사태 역시 CA 전 직원인 크리스토퍼 와일리의 폭로가 단초가 됐다.

내부자들의 폭로는 페이스북의 경우처럼 해당 기업에 큰 파장을 일으킨다. 민진규 국가정보전략연구소 소장은 “해당 기업들은 막대한 배상금이나 벌금을 부과받게 돼 사면초가에 빠진다”며 “기업 신뢰도 하락으로 기업의 정상적인 경영활동이 불가능해지고 경우에 따라서는 파산하는 기업도 속출한다”고 말했다. 실제 2001년 미국 7대 기업으로 선정된 에너지 회사 엔론은 내부자 고발로 엄청난 규모의 분식회계가 드러나 홍역을 치르다 파산했다. 전현직 직원들의 폭로로 에어백의 결함을 회사가 숨기려 한다는 사실이 세상에 알려진 일본 에어백 전문 제조업체 다카타도 자동차회사 역사상 최대 규모의 리콜과 천문학적 배상금을 이겨내지 못하고 결국 회사 문을 닫았다.

美, 엔론 사태 후 해고 막는 ‘옥슬리법’ 제정

적정한 보상 ‘도드프랭크법’ 등 생겼지만

사회 시스템 빈틈 여전...“법적 보호 강화를”



내부고발자들에 대한 처우는 제도적으로 보장되는 추세다. 미국의 경우 2001년 엔론과 월드콤의 대규모 회계비리 사건 이후 이듬해 제정된 ‘사베인스옥슬리법(SOX)’에 의해 내부고발자들이 보호를 받기 시작했다. 이 법에 따르면 기업은 내부고발자를 해고하거나 위협하지 못한다. 보복을 당했을 경우 민형사상 소송으로 구제받을 수 있도록 했다. 2010년에는 내부고발자에게 적정한 포상을 하도록 한 ‘도드프랭크법’이 추가됐다. 19일(현지시간)에는 뱅크오브아메리카(BoA) 메릴린치에 대한 미국 당국의 조사에 협조한 내부고발자들 3명이 역대 최고액인 8,300만달러의 보상금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아직은 내부고발 보호에 대한 사회적 시스템에 틈이 있어 내부폭로가 망설여지는 상황이다. 미국도 공익제보자로 지정되기 전, 즉 기업 비리가 사실로 확인되기 전에 규제기관이 아닌 외부에 문제를 제기한 경우 법의 보호를 받을 수 없다. 테라노스의 사기행각을 폭로했던 슐츠는 테라노스와의 소송에 필요한 비용 40만달러를 충당하기 위해 부모님 집을 팔아야 했다. 슐츠의 친할아버지이자 이 회사 이사였 조지 슐츠 전 미 국무장관의 95세 생일에 초대되지 못하는 등 친척들의 외면도 받았다. 또 회사에서 고용한 변호사들은 슐츠의 집에 수시로 찾아가 회사 기밀을 폭로했다는 이유로 소송을 제기하겠다며 협박하기도 했다.

이 때문에 슐츠처럼 공익을 위해 용기를 낸 내부고발자들의 의견을 기업이 적극 반영할 수 있도록 내부고발제도 시스템을 강화해야 한다는 주장이 힘을 얻고 있다. 국제공인부정조사관협회(ACFE)가 2016년 114개국의 기업과 정부기관들을 상대로 조사한 결과 제보로 문제가 적발된 기업 비율은 43%로 가장 높은 비중을 차지한다. ACFE 관계자는 “제보자의 51.5%가 내부 직원인 것으로 나타났다”며 “특히 내부고발 제도가 잘 갖춰진 기업일수록 그렇지 않은 기업보다 2배 이상 많은 제보가 이뤄졌다는 점을 고려하면 내부고발 제도가 하루빨리 정착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노현섭기자 hit8129@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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