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존 볼턴(왼쪽)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 내정자가 29일 워싱턴 국방부를 방문해 제임스 매티스 (오른쪽) 국방장관과 만나 인사를 나눈 뒤 국방부 청사 안으로 들어가고 있다./연합뉴스
그간 북핵 해법을 놓고 한미 단일대오를 거듭 강조해온 청와대에서 미국의 ‘리비아식 북핵 해법’에 대해 반대 목소리가 나오면서 청와대가 북한이 오랫동안 고수해온 ‘살라미 전술’의 덫에 걸려드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조심스럽게 제기되고 있다. 단계적 비핵화를 함께 주장하는 김정은 북한 노동당 위원장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의 극비 회동 직후 우리 정부 내에서 미묘한 입장 변화가 나타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우리 정부가 지난 25년 동안 북핵 문제를 두고 북한에 계속 끌려다니면서 실패만 반복했던 만큼 이번에 또다시 북핵 폐기 원칙에서 물러날 경우 한반도의 봄을 맞는 대신 그간 돌렸던 헛바퀴만 계속 돌리는 형국이 될 것이라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청와대 핵심관계자는 30일 사견임을 전제로 “핵 검증과 폐기는 순차적으로 밟아갈 수밖에 없는 것이 현실”이라며 “북한 핵 문제가 25년째인데 TV 코드를 뽑으면 TV가 꺼지듯이 비핵화가 끝나는 게 아니다”라고 말했다. 그간 북한이 수차례 핵미사일 실험을 통해 핵기술을 축적한 만큼 단번에 뿌리 뽑기가 어렵다는 현실론적 반응이다. 이 관계자는 미국이 주장하는 ‘리비아식 북핵 해법(선폐기 후보상)’에 대해서도 불가능하다는 입장을 전했다. 아울러 “미세하게 잘라서 조금씩 나갔던 것이 지난 방식이었다면 지금은 두 정상 간 선언을 함으로써 큰 뚜껑을 씌우고 그다음부터 실무적으로 해나가는 것이 가능하지 않겠느냐”는 언급도 더했다. 단계별로 비핵화 조치와 보상이 이뤄지던 과거 북핵 방식이 이번에도 어느 정도 차용될 수 있다는 인식이 담긴 것으로 보이는 부분이다.
이런 분위기는 전일 외교부에서 나온 반응과도 연계된다. 노규덕 외교부 대변인은 브리핑을 통해 “김 위원장이 언급했다고 하는 단계적·동시적 조치의 구체적인 의미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좀 더 분석이 필요할 것으로 생각한다”며 “향후 남북 및 북미 정상회담 등 과정을 통해 북핵 문제의 평화적 해결을 위한 방안들이 협의돼나갈 것으로 생각한다”고 말했다.
북한과 중국이 함께 주장하는 ‘행동 대 행동’ ‘안보·경제 연계 단계적 보상조치’ 등이 한반도 체스판에서 불쑥 힘을 얻기 시작한 것으로 여겨질 수 있는 반응들이 청와대와 관계부처 등지에서 나오기 시작한 것이다.
이런 가운데 북한이 중국에 이어 러시아까지 찾아갈 경우 북핵 폐기 원칙을 지키며 한반도 비핵화 해법을 찾기는 더욱 힘들어질 것이라는 지적도 나온다. 김용철 부산대 교수는 “참여국이 점점 늘어나면서 서로 각국의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얽히고 개입되면 단계적 비핵화든 일괄적 타협이든 이러한 남북 협상이 복잡해지는 방향으로 갈 수 있다”며 “남북미 등 3개국이 원래 애초에 출발한 상태이니까 3개국이 중심을 잃지 말아야 하는데 이 중심의 무게 추가 중국이나 러시아로 이동하면 오히려 그들의 전략에 휘말릴 수 있다”고 우려했다. 각자 다른 셈법만 고집하다 결국 실패한 6자회담의 전철을 밟을 수도 있다는 우려다.
북한의 살라미 전술에 휘말리지 않기 위해서는 미국과 마찬가지로 북핵 문제가 해결되기 전까지는 대북제재 원칙을 훼손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우리 정부도 강조해야 할 필요가 있다는 조언도 나왔다. 한 전직 외교관은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참모들이 수시로 대북제재와 압박을 강조하고 있는 것은 북한의 살라미 전술을 차단하기 위한 사전대응”이라며 “우리 정부도 제재를 강조하면 한미 공조를 과시할 수 있을 뿐 아니라 북한에 핵 폐기에 대한 원칙적 메시지를 보낼 수 있다”고 말했다.
/정영현기자 yhchung@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