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정부에서 구조조정 실패 경험이 있습니다.” (문재인 대통령, 3월16일 부산항 미래비전 선포식에서)
“한진해운의 파산은 선복량 7위의 선사와 68년 업계의 신뢰를 잃는 사건입니다.” (김영춘 해양수산부 장관, 4월3일 한국해운연합 2단계 구조혁신 추진 기본합의서 서명식에서)
5일 정부의 ‘해운재건 5개년계획’ 발표를 앞두고 지난 정부에서 단행된 해운업 구조조정이 다시 한번 회자되고 있다. 문재인 대통령과 김영춘 해양수산부 장관의 고백대로 한국 해운업 구조조정은 사실상 실패했다는 평가가 중론이다. 당시 한진해운 구조조정을 지휘했던 임종룡 전 금융위원장은 지난 2016년 말만 하더라도 아직 실패라고 말하기에는 이르다고 밝혔지만 지금 시점에서는 정부 관계자들도 해운업 구조조정 실패를 인정하는 분위기다. 이런 가운데 정부가 뒤늦게 해운업 재건 계획을 발표하지만 업계에서는 ‘소 잃고 외양간 고치기’라며 한숨 섞인 비판이 나온다. 해운업의 특성을 고려할 때 한번 추락한 경쟁력을 다시 끌어올리기가 만만치 않기 때문이다.
실제 국내 1위, 세계 7위인 한진해운이 파산한 후 한국 해운업의 경쟁력은 급격하게 추락했다. 국내 1위인 현대상선(011200)의 현재 시장점유율은 1.5%에 불과하다. 한진해운 법정관리 이전인 2016년 8월만 하더라도 한진해운과 현대상선의 시장점유율은 각각 3.0%와 2.1%였다. 지난 1년 반 동안 국내 해운사들의 시장점유율이 3%포인트 이상 추락한 것이다. 또 해운조사기관 피어스에 따르면 지난해 현대상선의 북미항로 점유율은 5.47%에 불과해 한진해운이 있던 2015년의 11.9%에 비해 절반 수준으로 떨어졌다.
이 같은 사태는 이미 예견된 일이다. 2년 전 한진해운 구조조정 과정에서도 이 같은 우려가 팽배했지만 당시 정부는 금융논리로 한진해운 구조조정을 밀어붙였다. 실사를 맡은 삼일회계법인이 한진해운 존속가치보다 청산가치가 높다는 보고서를 냈고 당시 구조조정을 진두지휘했던 임 전 위원장은 “산업 자체를 위해 어떤 비용을 지불하더라도 살려야 한다는 주장은 현실적으로 가능하지도 않고 바람직하지도 않다”고 강조했다. 이 같은 금융논리에 구조조정의 핵심 목표가 돼야 할 ‘산업경쟁력 강화’는 뒷전으로 밀려났다. 그렇게 40여년의 역사를 가진 한국 1위 해운사 한진해운은 한순간에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해운업 구조조정의 후유증은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해운사가 핵심 자산을 헐값에 매각했다가 이제 와서 다시 비싸게 되사오는 해프닝도 벌어지고 있다. 최근 현대상선은 부산신항만 4부두 운영사(HPNT) 지분을 늘리기 위해 사모펀드인 IMM인베스트먼트와 싱가포르 국적의 항만 운영사 PSA와 협의를 진행하고 있다. 현대상선은 애초 HPNT 지분 50%+1주를 보유해 최대주주였으나 2016년 유동성 위기를 겪으며 PSA에 40%+1주를 800억원의 헐값에 매각한 바 있다. 앞서 현대상선은 2014년 3월 IMM인베스트먼트에 HPNT 지분 50%-1주를 매각할 당시에는 2,500억원을 받고 팔았다. 이에 현대상선이 PSA에 지분을 매각할 당시 해운사가 핵심 자산인 항만을 시간에 쫓겨 매각하는 것에 대한 비판여론이 있었지만 정부는 알짜 자산을 팔아서라도 빨리 자금을 확보하라며 밀어붙인 바 있다. 특히 지분을 서둘러 매각하는 과정에서 PSA 측에 일방적으로 유리한 독소조항까지 포함시켰다. 당시 PSA 측은 오는 2023년까지 매년 터미널 이용요금을 일정 수준씩 인상하는 조건을 걸었으며 요율도 주변 항만과 비교해 2~4배 높은 수준으로 책정했다. 이번에 현대상선이 HPNT 지분 50% 확보를 다시 추진하는 것도 터미널 이용요금 부담을 줄이기 위해서다. 결과적으로 현대상선은 불과 2년 만에 HPNT 지분 재매입을 추진하면서 정부의 구조조정 방향이 잘못됐음을 인정한 꼴이 됐다. 또 생존을 위해 헐값에 매각한 자산을 비싼 가격을 주고 되사올 가능성이 높아졌다.
한진해운 사태로 큰 비용을 치른 정부도 뒤늦게 금융 위주의 산업 구조조정에 대해 반성하는 모습이다. 정부는 지난해 12월 ‘새로운 기업 구조조정 추진 방향’을 발표하면서 부실기업의 회생 여부를 결정할 때 재무적 관점의 회계 실사와 더불어 산업적 측면을 고려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조선업을 살리고 해운업을 버린 정부의 선택도 아쉬움으로 남는다. 성태윤 연세대 경제학부 교수는 “당시 정부가 전체적인 산업 측면을 고려하지 않고 정치적인 측면을 고려하면서 대우조선해양(042660)을 살리는 대신 엉뚱하게 한진해운을 죽였다”며 “대우조선해양을 살리면서 멀쩡한 조선사들도 어려워졌으며, 반대로 한진해운을 죽이면서 한국 해운업은 해외 네트워크를 잃어버렸다”고 지적했다.
이런 가운데 정부가 뒤늦게 해운업 재건 계획을 발표하지만 일각에서는 이미 때를 놓쳤다는 지적도 나온다. 한국 최대의 해운사인 한진해운이 파산하는 과정에서 한국 해운업의 신뢰도가 이미 땅에 떨어졌기 때문이다. 해운업계의 한 고위관계자는 “해운업은 서비스업이기 때문에 신뢰가 중요하다”며 “한진해운 파산 이후 물류대란 사태를 겪은 화주들로부터 신뢰를 회복할 수 있을지 의문”이라고 지적했다.
/고병기기자 staytomorrow@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