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원이 6일 “삼성그룹의 승계작업은 존재하지 않았다”고 또다시 결론 내렸다. 이날까지 국정농단 재판에서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경영권 승계작업이 있었다고 인정한 재판부는 3곳 가운데 1곳뿐이다. 하급심의 무게추가 ‘승계는 없었다’로 기울어 대법원이 이런 판단을 뒤집기 어려울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22부(김세윤 부장판사)는 이날 “이 부회장이 박근혜 전 대통령과 독대하며 개별 현안을 명시적·묵시적으로 청탁했다고 보기 어렵다. 포괄적 현안으로서의 승계에 대한 명시, 묵시적 청탁도 논리적으로 맞지 않다”고 설명했다.
김 부장판사는 “일반인은 ‘포괄적 현안으로서 승계작업은 당연히 진행되는 것이 아닌가’라고 생각할 수 있다”며 “형사책임을 논하는 법정에서는 승계에 대한 개념이 명확해야 하고 합리적 의심이 없을 정도로 증명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다만 삼성이 최순실씨 딸 정유라씨의 승마 지원용으로 제공한 마필 값 등 72억원은 현안 청탁 여부와 상관없이 전달한 것만으로 성립되는 ‘단순뇌물죄’에 해당해 박 전 대통령의 뇌물수수 유죄가 인정됐다.
검찰과 박영수 특별검사팀은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 삼성생명의 금융지주사 전환 등 승계와 지배구조 개편을 위한 여덟 가지 현안이 있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 부회장은 현안을 청탁한 일도 없을뿐더러 현안을 묶어 승계로 보기도 어렵다는 게 법원의 판단이다. 개별적이든 포괄적이든 승계 현안도 없고 명시적이든 묵시적이든 청탁도 없었다는 의미다.
지난 2월5일 서울고법 형사13부(정형식 부장판사) 역시 이 부회장의 뇌물공여 재판 항소심에서 같은 판단을 내렸다. ‘삼성 승계는 이 부회장을 유죄로 만들기 위한 가공의 틀’이었다는 삼성의 주장이 설득력을 얻은 결과다. 당시 재판부는 “삼성 계열사들이 추진한 현안이 성공하면 이 부회장의 삼성전자·삼성생명 지배력 확보에 직·간접적으로 유리하다는 점을 부인할 수 없다”면서도 “이는 경영상 필요나 목적성이 있고 이 부회장에게 미치는 효과도 주관적”이라고 설명했다.
반면 이 부회장 1심 재판부(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27부·김진동 부장판사)는 “포괄적 현안으로서의 승계는 존재했다”며 이 부회장이 박 전 대통령에게 이를 묵시적으로 청탁했다고 판단했다.
삼성과 달리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은 박 전 대통령과 독대하며 현안을 청탁한 사실이 인정됐다. 다만 명시적이 아닌 묵시적 청탁만 받아들여져 항소심에서 치열한 다툼이 예상된다. 형사합의22부는 “2016년 3월14일 독대에서 박 전 대통령과 신 회장 사이에 명시적인 청탁이 있었다고 인정하기는 어렵다”면서도 “롯데월드타워 면세점 재취득에 대한 (묵시적) 부정한 청탁이 있었다”고 판단했다. 롯데는 2016년 5월 K스포츠재단에 공식 출연금 외에 별도로 70억원을 지원했다가 돌려받았지만 재판부는 신 회장의 제3자 뇌물공여 혐의를 유죄로 판단해 징역 2년6개월의 실형을 선고했다.
최태원 SK 회장은 독대에서 현안을 언급하기는 했지만 뇌물 요구를 거절해 아예 기소되지 않았다. 재판부는 “최 회장은 2016년 2월16일 박 전 대통령과 독대하며 동생(최재원 SK 수석부회장)의 가석방, CJ헬로비전 합병 등 현안을 언급했고 대통령은 K스포츠재단의 가이드러너 사업 협조를 구했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SK는 독대 뒤 실제 지원 요구는 물리쳤다. 재판부는 박 전 대통령의 ‘89억원대 SK 뇌물 요구’만 유죄로 인정했다.
/이종혁기자 2juzso@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