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찰팀24/7]이례적 장기수사·잦은 수사관 교체 의문..."왜 늦게 신고했나" 2차 피해도

■성폭행 혐의 12명 모두 무혐의 '단역배우 자매 자살' 재조사
언니, 단역배우 관리 반장 등에
5개월간 40차례 성폭행 등 당해
알바 소개 동생도 죄책감에 자살
두 딸 잃은 충격에 부친마저 사망
엄마는 그후 14년간 '지옥 생활'
경찰청TF, 관련 수사관들 조사
공소시효 지나 처벌에는 한계


지난 2009년 8월28일 단역배우 아르바이트를 했던 여성 A(당시 34세)씨가 빌딩에서 투신해 숨졌다. 2004년 7월부터 5개월 동안 단역배우를 관리하는 반장 등 관계자 12명에게 40여 차례의 성폭행과 성추행·폭행을 당했다고 경찰에 고소한 지 4년여 만이다. 동생 B(당시 30세)씨는 자신이 단역배우 아르바이트를 소개해서 이런 일이 일어났다는 죄책감에 언니가 세상을 떠난 지 6일 만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두 딸을 졸지에 가슴속에 묻은 아버지도 슬픔을 이기지 못하고 세상을 등졌다. 단란했던 한 가족이 순식간에 풍비박산이 났다. 경찰은 당시 사건을 무혐의로 결론 내렸다. 이 사건은 피해자는 있지만 가해자는 없는 사건으로 기록됐다.

최근 미투(MeToo) 열풍에 힘입어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 올라온 이른바 ‘단역배우 두 자매 자살사건’을 재수사해달라는 청원에 20만명 이상이 동참하면서 경찰이 진상조사에 착수했다. 이 사건은 영등포경찰서 소관이지만 사안의 중대성을 감안해 경찰청이 직접 성폭력대책과·감찰·수사과 등 20여명 규모의 전담팀을 꾸려 조사하기로 했다. 이번 재조사에서 경찰이 꼭 살펴봐야 할 쟁점들을 짚어본다.

◇이례적 장기수사, 의지 있었나=경찰은 A씨가 2004년 12월 고소장을 접수한 후 1년7개월이 지난 2006년 7월에야 무혐의 불기소 의견으로 사건을 검찰에 송치했다. 1차 수사기관인 경찰이 본인이 직접 피해를 당했다며 고소한 사건을 1년 반 넘도록 장기수사하는 것은 매우 이례적이다. 게다가 경찰은 당시 담당 수사관을 두 차례나 교체했다. 경찰청 진상조사전담팀(TF) 관계자는 “당시 기록을 보면 피해자가 수사관 교체를 요청해 본격적인 조사는 사실상 세 번째 수사관이 사건을 담당한 2006년 2월부터 진행됐다”며 “수사관이 교체된데다 가해자로 지목된 인물이 많아 대질심문 등에도 많은 시간이 소요된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A씨는 왜 수사관 교체를 요구했을까. 유족에 따르면 당시 조사를 맡았던 수사관이 조사에 소극적이어서 진전이 없었다고 주장했다. 서울경제신문 취재진과 만난 A씨의 모친 장연록씨는 “고소한 지 한 달이나 지나서야 담당 경찰관들이 불러 경찰서에 찾아갔더니 ‘이것이 사건이 된다고 생각하느냐. 경찰이 아닌 노동청이나 국가인권위원회에 신고하라’고 오히려 핀잔을 줬다”며 “수사관이 교체된 뒤에도 이 사건을 맡은 다른 경찰들도 비슷한 반응을 보였다”고 말했다.


당시 조사를 받았던 12명 중 일부는 아예 혐의를 부인했고 일부는 성관계는 인정했지만 합의에 의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당시 경찰은 수사 후 무혐의 불기소 의견으로 검찰에 송치했고 이후 A씨가 고소를 취하해 공소권 없음으로 불기소 처분됐다. 장씨는 “딸 아이가 성병에 걸려 치료까지 받고 있었지만 경찰은 증거로 인정해주지 않았다”며 “4개월 남짓한 짧은 기간에 잘 알지 못하는 남성 10여명과 수십 차례에 걸쳐 합의하에 성관계를 했다고 보는 것은 성매매 여성으로 인정한 것과 다를 바 없다”고 반박했다.

◇“성기 그려 봐라” 수사 과정에서 2차 피해=유족 측에 따르면 A씨는 가해자와 같은 공간에서 여러 차례 대질심문을 받았다. 가해자들에게 신고 사실과 진술 내용이 그대로 노출됐다. A씨는 가해자들로부터 “가족을 죽여버리겠다”는 등의 협박을 받았고 경찰에 도움까지 호소했지만 보호조치는 전혀 이뤄지지 않았다. 유족 측은 오히려 수사를 맡은 경찰이 “성폭행을 당했는데 왜 이제 와서 신고하나” “성기를 그려봐라”라고 말해 2차 피해를 입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실제 A씨는 수사를 받는 과정이 너무 힘들어 중간에 수차례 고소를 포기하고 싶다는 의사를 밝힌 것으로 전해졌다. 장씨는 “딸이 워낙 심하게 성적 수치심을 느껴 정상적으로 조사를 받기 어려웠다”며 “조사 과정에서 받은 충격으로 차도로 뛰어들어 자살을 시도한 적도 있다”고 전했다.

경찰은 이번 진상조사에서 수사과정의 문제를 집중적으로 살펴볼 방침이다. 경찰 관계자는 “당시 담당 경찰이 수사 관계자들에게 직권남용 행위를 했었는지를 철저히 조사할 방침”이라면서 “다만 당시에는 성폭력 가해자와 피해자의 대질심문을 최소화하라는 규정이 없었고 피해자를 지원하는 시설도 미비했던 점이 아쉽다”고 말했다.

◇14년 전 사건 처벌할 수 있나=경찰청 TF는 수사 자료와 장씨로부터 당시 사건 관련 자료 일체를 넘겨받아 검토하고 있다. 조만간 당시 사건을 담당했던 서울 영등포경찰서 여성청소년과 소속 경찰관과 팀장·과장에 대한 조사에 착수할 예정이다. 조사 결과 2차 피해 등 수사과정에서의 문제가 확인되면 관련자들에 대한 징계도 고려하고 있다. 추가 피해를 막기 위한 재발방지 대책도 내놓기로 했다.

다만 성폭력 고소사건 자체에 대한 재조사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것이 경찰의 입장이다. 공소시효가 한참 지난데다 피해자가 살아 있지 않아 제대로 된 조사가 어렵다는 것이다. 경찰 관계자는 “유족들이 억울한 일이 없도록 철저한 진상조사를 벌여 드러난 문제점에 대해 엄정하고 강력하게 대처하겠다”며 “유족 측의 입장을 최대한 반영해 조사할 것”이라고 말했다. /최성욱·오지현기자 secret@sedaily.com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