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계우 ‘꽃과 나비(花蝶圖)’ 19세기, 종이에 수묵채색, 2폭 각 127.9x28.8cm /사진제공=국립중앙박물관
바람에 떨어진 벚꽃인가 싶었더니 다시 휘리릭 날아오르는 것이, 흰 나비였다. 동백 목련이 흐드러지고 개나리 진달래가 꽃망울을 터뜨리더니 드문드문 나비 떠다니는 것도 보이곤 한다. 그저 자연을 바라보는 것만으로 근심 걱정을 떨칠 정도로 밝고 따뜻한 기운이 충만한데, 자칫하다간 챙겨야 할 일마저 깜빡하기 일쑤다. 이게 다 봄 탓이다.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인 꽃이지만 그보다 더 안달하게 하는 나비다. 느긋한 날갯짓이 쉽게 잡힐 것 같으면서도 요리조리 피해 다니고, 어디 좀 보자 싶으면 이내 눈 밖으로 달아나버린다. 봄비가 조금이라도 굵을라치면 꽃잎 떨어질 걱정에 손톱보다 좀 더 큰 나비 날개 젖을 근심이 함께 얹힌다.
●조선의 ‘레오나르도 다빈치’
두 폭 양쪽에 열마리씩..모란·붓꽃·장미와 어우러져
몸통·날개 비늘 등 표본 옮겨놓은 듯 묘사력 뛰어나
조선고전 중 과학적 가치 으뜸..연구 자료로 삼기도
그 탐스런 나비를 달아나지도, 날개 적시지도 않게 그림 속에 한가득 잡아둔 이가 있으니 조선 말기의 사대부 화가 일호 남계우(1811~1890)다. 어찌나 나비를 잘 그렸던지 이름 대신 ‘남나비’ 혹은 ‘남접(南蝶)’, ‘남호접(南胡蝶)’으로 불렸다.
국내 유수의 미술관뿐 아니라 평양 조선미술박물관까지도 남계우의 나비 그림을 소장하고 있는데 그 중 수작으로 꼽히는 국립중앙박물관의 두 폭짜리 ‘꽃과 나비(花蝶圖)’가 마침 봄을 맞아 오는 10일부터 서화실에 걸린다.
이 그림은 두 폭 양쪽에 각각 열 마리씩 나비가 노닌다. 왼쪽에 소복하게 핀 새빨간 모란과 오른쪽의 진보라색 잎 늘어뜨린 붓꽃이 화려함의 균형을 이루며 그 주변을 촉규화, 부용, 장미 등이 은근하게 에워쌌다. 꽃내음을 맡고 찾아든 나비의 묘사력이 어찌나 생생한지 곤충학자들이 그림만으로 세부 종을 알아볼 수 있을 정도다. 왼쪽 폭에는 위에서부터 제비같은 꽁지깃이 멋들어진 제비나비로 시작해 꼬리명주나비, 배추흰나비, 물결나비와 이름 모를 나비, 호랑나비, 갈구리 신선나비, 봄처녀나비 등이 등장한다. 오른쪽은 네발나비, 굴뚝나비, 황오색나비, 부전나비가 올망졸망 모였고 그 아래로 제비나비와 노랑나비, 대만흰나비가 맴돈다. 백모란 근처에 남방공작나비, 이제 막 장미에 앉은 호랑나비와 노랑나비도 보인다.
남계우의 또 다른 ‘꽃과 나비’ 중 세부. /사진제공=국립중앙박물관
나비 주변으로 드문드문 노르스름한 조각들이 보이는 것은 종이 때문이다. 당시 중국에서 수입해 쓰던 냉금지(冷金紙)라는 고급 재료로, 금박이 뿌려져 꽃잎 날리는 듯한 화려함을 더한다. 나비 날개 표면을 그릴 때 금가루와 돌을 갈아만든 석채까지 살짝 묻혔으니 진짜 나비같은 반짝임이 고스란히 느껴진다.
그림 위에 쓰인 화제(畵題)는 나비의 별명에 대한 글이다. “…나비는 일명 ‘야연’이라고도 하고 강동에서는 ‘달말’이라 부른다. 그중 큰 것은 박쥐만하다. 먹색이고 푸른 반점이 있는 것은 ‘봉자’ 혹은 ‘봉거’라고 한다”는 내용이다. 더불어 ‘귤의 좀이 나비로 변한다’부터 배추벌레, 바곳의 잎, 채소, 백합꽃, 나뭇잎 등이 나비로 변한다고 한 고전의 글을 인용해 적었다.
나비의 날갯짓 순간을 포착해 꺾이듯 휘어진 움직임까지 그려낸 필력과 과학자 못지않은 관찰력으로 따지면 남계우는 ‘조선의 레오나르도 다빈치’라 해도 과언 아니다. 일례로 그림에서 가장 화려한 날개의 제비나비를 보면 수컷의 날개 비늘이 빛에 따라 반짝임을 달리해 푸른색, 청색을 띠는 것까지 세밀하게 그려놓았다. 제비나비 암컷은 몸통의 황록색 광택을 비롯해 뒷날개 끝 주홍색 반달무늬와 날개 윗면의 황록색 털 비늘, 아랫면의 노란 띠까지 정교하게 그렸다. 보통 사람 같으면 ‘어디가 그렇게 보이느냐’고 되물을 일이건만, 그 미묘한 차이를 세세하게 파악하고 그리기까지 했으니 천재임이 분명하고 어쩌면 집착이나 광기가 아니었을까 싶다.
남계우의 또 다른 ‘꽃과 나비’ 중 세부. /사진제공=국립중앙박물관
남계우는 의령 남씨 명문가 출신으로, 서울의 남촌(南村) 솔고개라는 동네에서 태어나 용인으로 이사하기 전인 55세까지 살았다. 지명처럼 소나무가 많은 언덕배기 동네가 지금은 중구 소공동 한국은행 본관 뒤쪽 언저리다. 도로와 상가로 빽빽이 덮여버린 그곳에 옛날에는 나비가 많았던 모양이다. 열여섯 살이던 어느 날, 집에서 나비 한 마리를 발견했는데 의관정제 하지 않은 평상복 차림으로 10리 밖 동소문까지 쫓아가 결국 나비를 잡아왔다는 일화가 전한다. 동소문은 지금의 혜화문이니, 소공동에서 혜화동까지 나비 한 마리를 쫓아 뜀박질 한 대단한 근성이다. 근대기 생물학자 석주명(1908~1950)이 남계우의 나비 그림을 근거로 한반도의 나비를 연구해 쓴 ‘조선산접류총목록’에서 확인된 ‘실화’다. 석주명은 “남나비의 그림이 (나비에 관한 한) 조선 고전 중에서 가장 과학적 가치가 많은 것”이라며 “남계우가 그린 나비는 필자가 조사한 범위에서는 37종”이라고 밝혔다. 숨길 수 없는 실력은 아들 없는 형님댁에 양자로 보낸 장남 주원에게 이어졌다. 남주원이 그린 나비 그림에 남계우가 나비 서너 마리를 더하고 꽃을 첨가해 그린 ‘합작도’가 전한다. 남계우의 형은 ‘옥루몽’으로 유명한 소설가 남영로(1810~1857)였으니 남씨 가문이 19세기 조선 예술계를 주름잡았다.
●명문가서 태어났지만 청빈했던…
부·벼슬 탐닉보다 사대부로서 과학·예술 조화 시도
초현실적 나비 통해 조선 신흥부유층 욕망 꼬집어
어려서부터 나비에 관심을 품은 남계우는 나비를 잡아다 유리병에 넣거나 표본으로 만들고 책갈피에 끼워두는 식으로 가까이서 관찰했다. 잘 말린 나비를 창(窓)에 대고 그 위에 종이를 놓고 형태를 따라 그렸다는 기록도 전한다. 나비뿐 아니라 날개 투명한 잠자리, 매미도 사진처럼 그려냈으며 야들야들한 꽃잎도 기막히게 표현했다. 나비는 한자 ‘접’ 자가 80세 노인을 뜻하는 ‘질’ 자와 발음이 같아 그림 자체로 장수를 기원한다. 포개지는 양 날개가 부부의 금실을 뜻하는데다 그 고운 자태만으로 부귀영화를 상징해 많은 사람들이 그를 찾아가 나비 그림을 주문했다.
그렇다면 남계우가 이토록 많은 나비그림을 그린 까닭이 돈 때문에, 혹은 그저 아름다움에 탐닉해서였을까? 아마도 아니었을 것이라 짐작한다. 그는 숙종 때 영의정을 지낸 남구만의 5대손이다. 남구만은 소론의 영수 자리를 지켰고 인조반정 이후 득세한 서인 세력에 속한 남구만은 북벌론을 앞세운 조선중화주의의 중심인물이었다. 가세는 기울었으나 가풍을 물려받은 남계우다. 그는 벼슬과 부를 탐내기보다는 화가로 살며 청빈하려 애썼다. 재주가 출중해 그림에 빠졌고 자연히 찾는 사람이 많았다. 그럼에도 화가는 사대부의 자부심으로 당대의 실학사상을 접하며 과학과 예술의 조화를 시도한 것이리라 추측해 본다.
남계우의 또 다른 ‘화조도’ 중 세부. /사진제공=국립중앙박물관
한발 더 나아가 19세기 조선의 신흥부유층에 대한 뼈있는 냉소도 감지된다. 다시 그림을 보자. 작가는 허공에 나풀거리는 나비를 그리되 입체적으로 보이게 하겠다는 허상은 품지 않았다. 그래서 실제보다 더 생생한 나비는 평면적이요, 박제한 듯 인위적으로 가장 아름다운 자태만을 뽐낸다. 초현실적이다. 이런 꿈같은 광경에 사람들은 열광했다. 기괴한 로코코미술이 그랬듯 과장되게 화려하고 장식적인 것은 세기말적 증상이다. 미술사학자 최열은 저서 ‘화전’(청년사 펴냄)에서 “남계우의 나비들은 무리짓고 있다. 그같은 충만성은 욕망의 표현이기도 한데, 화가의 탁월한 조형감각에 바탕을 두는 것이면서 또한 도시의 탐욕을 거울처럼 비추는 것”이라고 봤다. 백인산 간송미술관 연구실장은 명문가 출신 남계우가 그린 장식적인 그림을 두고 “조선 말기의 시대 분위기가 겉모습은 화려하지만 내면은 생기를 잃은 채 박제처럼 굳어가고 있었다”고 꼬집었다.
가수 십센치가 ‘봄이 좋냐’라는 곡에서 “꽃이 언제 피는지 그딴 게 뭐가 중요한데/ (중략) 결국 꽃잎은 떨어지지 니네도 떨어져라/ 몽땅 망해라”라고 한 것을 그저 시샘으로만 들을 것이 아니듯. 봄이 왔다고 너무 들뜨지는 말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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