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문 제이에스티나 회장
‘9988’, 그리고 ‘12.3’
국내 중소기업의 현황을 말할 때 자주 언급되는 숫자다. 전체 기업체 수의 99%가 중소기업이고 전체 고용인원의 88%가 중소기업에서 근무한다는 ‘9988’은 우리나라 경제구조에서 중소기업 역할의 중요성을 강조할 때 쓰인다. 반면 국내 중소기업의 평균 수명을 나타내는 ‘12.3년’은 상대적으로 열악한 경영 여건과 기업의 존속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단적으로 드러낸다.
김기문(사진) 회장이 이끌고 있는 제이에스티나(옛 로만손)는 이 두 개의 상징적 숫자 사이에서 자신만의 성(城)을 쌓아올린 강소기업이다. 지난 2007년부터 2015년 2월까지 두 차례에 걸쳐 중소기업중앙회 수장을 지내며 중소기업계의 목소리를 대변했던 김 회장은 지난 1일로 창립 30돌을 맞이한 중소기업의 창업주이기도 하다. 이 회사는 지난해 1,400억원의 매출을 올렸다.
김 회장은 8일 서울경제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중소기업의 존속기간이 10년 남짓 되는 상황에서 (제이에스티나가) 서른 번째 생일을 맞았다는 사실에 감회가 새롭다”며 “창업 때부터 글로벌 시장을 목표로 사업을 펼쳐나갔던 것이 무한경쟁의 시대를 버틸 수 있었던 가장 큰 원동력이었다”고 회고했다.
김기문 회장이 최신 시계 트렌드를 설명하며 자신이 차고 다니는 시계 사진을 보내왔다. 세라믹 소재에 크로노그래프 기능이 적용된 시계로 김 회장의 시계 철학이 고스란히 반영됐다는 평가다.
2016년 제이에스티나로 사명을 바꾸면서 ‘올드보이’에게는 다소 낯설게 느껴지지만 이전 사명인 ‘로만손’이라는 이름은 국내 소비자는 물론 해외에서도 합리적인 가격에다 기능까지 탁월한 시계 제품이라는 이미지로 각인됐다. 모 시계업체에서 영업을 담당하며 국내외 시장을 누볐던 김 회장은 1988년 ‘내 사업을 해야겠다’는 포부를 품고 창업에 뛰어들었다. 당시만 해도 국내 시계시장은 삼성시계·아남시계·오리엔트 등 대기업들이 80% 이상을 독점하던 시장이었기에 이름도 낯선 중소기업이 자체 브랜드로 승부를 건다는 것은 모험에 가까웠다. 김 회장은 해외에서 먼저 브랜드를 알리겠다는 ‘역발상’으로 사업을 키워갔다. ‘로만손’이라는 이름은 시계제조로 유명한 스위스 공업도시 ‘로만시온’에서 따왔다.
처음에는 중동을 비롯해 해외에서 시계 전시회가 열린다고 하면 무조건 달려가서 샘플을 전시했다. 그러다가 중동에서 시계 밀수꾼으로 오해를 받아 검색 받는 일도 있었다. 김 회장은 “007가방에는 시계가 많이 안 들어가니까 큰 트렁크 백을 두 개나 메고 다녔다”며 “가방 하나에 시계가 500개씩은 들어갔으니 무게가 30~40㎏이나 됐고 누가 보든 오해 받기 십상이었다”며 미소를 지었다.
포기하지 않고 해외시장에 노크를 하다 명품시계 못지않은 디자인이 필요하다는 판단을 했던 김 회장은 시계 유리에 아름다운 각을 새긴 ‘커팅글라스’ 공법을 적용하면서 새로운 전기를 맞이했다. 로만손의 ‘커팅글라스’ 기법은 국내에서도 선풍적인 인기를 끌면서 로만손의 이름을 본격적으로 알리는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
김 회장은 “해외시장에서 성공한 로만손이 국내에 들어오면서 내세웠던 광고 카피가 ‘해외에서 더 유명한 로만손’이었다”며 “제가 직접 만든 이 카피 안에 글로벌 전략을 중심으로 사업을 펼치고 있는 제이에스티나의 DNA가 녹아 있다”고 소개했다. 전 세계 시계산업은 사양산업이라는 진단을 받은 지 오래다. 시계의 본래 기능이었던 시간 확인에 대한 수요는 이미 모바일폰, 웨어러블 기기가 흡수하면서 시계를 찾는 이들이 점차 줄어들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김 회장은 이러한 위기가 역설적으로 럭셔리 시계 브랜드가 살아남을 수 있는 이유라고 강조했다.
그는 “과거에는 시계의 기능이 중요했다면 지금은 (시간 확인이라는) 시계 본연의 기능은 사실상 사라지고 미적 감각이 중요해지고 있다”며 “소비자에게 시계를 판매하는 채널이 변해야 한다는 의미이며 제이에스티나 역시 해외 유명 도시에 직매장을 내면서 소비자에게 직접 다가서며 브랜드를 알려야 한다는 당위를 던져준다”고 말했다.
김 회장의 이 같은 판단은 제이에스티나가 주얼리와 핸드백 등 장신구 분야로 사업을 확장하는 직접적인 계기가 됐다. 2003년 시계 제조에서 쌓은 기술력과 노하우를 바탕으로 주얼리 브랜드인 ‘제이에스티나’를 선보였는데 당시 광고 모델로 피겨스케이팅 선수 김연아를 내세우며 ‘김연아 주얼리’라는 별칭까지 얻으며 인기를 얻었다. 이후 2011년에는 핸드백 사업에 진출하며 토털패션기업으로의 도약에 나섰다. 현재 제이에스티나의 사업 포트폴리오는 핸드백(제이에스티나백)-화장품(제이에스티나뷰티)-패션잡화(제이에스티나레드)-시계(로만손) 등으로 이뤄져 있다.
김 회장은 “시계 하나로 우뚝 선 로만손이 시류에 영합해서 본업과 관계없는 사업에 손댔다면 30년 업력을 쌓으며 지금의 자리에 오를 수 없었을 것”이라며 “핸드백 사업에 처음 손댔을 때 얼마 지나지 않아 사업을 철수하는 아픔도 겪었지만 지금은 제이에스티나가 글로벌 경쟁력을 갖춘 토털패션기업으로 성장하고 있다고 자신한다”고 강조했다.
회사 설립 30돌을 맞이한 김 회장의 눈은 창업 당시처럼 글로벌 시장을 향해 있다. 제이에스티나의 주얼리 워치는 이미 중국 고소득층 사이에서 ‘머스트 해브 아이템’으로 올라선 지 오래고 2016년 이후 캄보디아·미얀마·우크라이나 등에 주얼리 매장을 열었다. 오는 5월에는 홍콩공항 신라면세점에 매장을 열 계획이다.
김 회장은 “국경의 의미가 사라지고 글로벌 기업 간 경쟁이 치열해진 시대에는 글로벌 브랜드로 도약하지 않고서는 100년 기업으로 도약할 수 없다”며 “단순히 바이어를 통해 제품을 수출하는 글로벌화가 아니라 자체 브랜드로 해외시장을 개척하고 해외 소비자들이 먼저 찾는 적극적인 의미의 글로벌 전략이 필요하다”고 힘주어 말했다.
/박해욱기자 spooky@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