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일 방송되는 KBS2 ‘다큐멘터리 3일’에서는 ‘세월을 두드리다 - 부산 영도 깡깡이마을 72시간’ 편이 전파를 탄다.
깡깡깡, 세월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리면 대평동의 하루가 시작된다. 시원한 부산 앞바다, 그리고 해안선을 따라 늘어선 수리조선소와 함께하는 부산 영도 깡깡이마을에서의 72시간이다
▲ 선박의 종합병원, 부산 영도 깡깡이마을
대한민국 최초의 근대식 수리조선소 마을인 부산 영도 대평동. 영도대교 밑에 자리 잡은 이곳은 본래 포구였다. 하지만 1912년 일제강점기 당시 일본이 최초의 근대식 조선소를 세우기 시작하면서 본격적인 조선 산업의 발상지가 됐다. 어선을 수리하기 좋은 지형으로 해방 후에도 조선업은 그대로 유지해왔고, 7~80년대 원양어업 붐을 타고 수리조선업의 메카로 자리 잡았다. 이때 선박에 붙은 녹이나 조개류를 제거하기 위해 망치로 두드릴 때 나던 ‘깡깡’ 소리가 마을을 뒤덮었는데 이로 인해 ‘깡깡이마을’로 불리기도 했다.
2008년부터 시작된 조선업의 불황은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지만 깡깡이 아지매와 수리조선소를 둘러싼 2백 여개의 공업사들은 여전히 지친 배에 생명을 불어넣고 있다.
▲ 배를 두드리며, 세월도 두드렸던 깡깡이 아지매
자갈치 아지매, 재첩국 아지매와 함께 부산의 3대 아지매라 불리는 깡깡이 아지매가 있다. ‘깡깡이’란 철로 만들어진 배의 노후화를 방지하기 위해 배 밑창이나 측면에 붙은 조개껍데기와 녹을 떨어내는 일. 배가 깨끗하게 수리되기 위한 기초 작업이라고 한다. 대평동의 전성기엔 약 200명의 깡깡이 아지매가 있었지만 현재는 수리조선업의 불황으로 20명밖에 남지 않았다고.
다큐멘터리 3일은 그중에서도 나이 40살에 호기심으로 뛰어든 아주머니부터 짧은 쉬는 시간마다 아이 젖을 물려가며 깡깡이 했던 아주머니까지, 배 밑바닥에서 일할 수밖에 없었던 깡깡이 아주머니들의 이야기를 카메라에 담았다. 그들에게 깡깡이란 삶의 애환이자 산업혁명의 역사였다.
“젖 먹는 아기 놔두고 가서 일하고. 또 열심히 뛰어와서 아기 젖 먹여놓고 젖 먹여놓고 가서 또 일하고 그래서 조금만 하다 말아야지 한 것이 그만 지금까지 하게 됐지.”
- 전순남 (70, 깡깡이 아지매)-
▲ 대평동의 세월은 멈추지 않는다
아무리 씻어도 없어지지 않는 손에 묻은 기름때, 3일마다 세탁소에 맡겨야만 하는 찌든 작업복은 3D 조선업의 작업 환경을 그대로 보여준다. 부품을 깎고, 용접하고, 만들어내는 공업 기술은 과거 최고의 신랑감의 조건이었지만 요즘엔 젊은 사람들의 외면을 받는 게 현실. 어려웠던 시절, 고향을 벗어나 찾아온 대평동에서 아무리 힘들어도 그저 흰쌀밥 먹는 게 좋았던 젊은이는 공장장이 되었다. 이제 그 길을 걷는 새로운 젊은 피가 삶의 터전을 이어가고 있다.
“힘들어도 그 맛에 사는 거지. 고생한 만큼 내가 일을 해서 배가 멋지게 문제없이 운항하는 거, 그 맛으로 사는 거지.”
- 이영주 (61) -
▲ 깡깡이마을 사람들이 꿈꾸는 만사‘대평’
영도대교가 세워지기 전, 영도의 교통수단은 통선이었다. 작은 통통배들은 사람과 짐을 실으며 바다 위의 택시 역할을 해왔다. 지금도 항구까지 들어올 수 없는 큰 상선의 주문을 받으며 쉼 없이 오가는 통선들. 숲길보다 바다가 더 좋다고 노래하는 대평동 시인, 유성호의 김대율 선장을 따라 그들의 세계를 들여다봤다.
한 집 건너 하나가 다방이었던 대평동에서 다방은 선원들의 쉼터 그 이상이었다. 선장들은 다방에서 선원을 구했으며, 주인은 선원을 추천해주는 등 직업소개소이기도 했다고. 세월이 흐른 지금은 그 많던 다방이 다 사라져버렸지만 여전히 40년 동안 자리를 지키고 있는 다방을 찾아가 봤다. 진한 쌍화차 한 잔이 세월을 얘기해주듯, 그곳에 들린 사람들은 옛 추억을 곱씹는다.
“선원이 없으면 나한테 부탁을 해요. 그러면 내가 중개를 해주고 이러다 보니까 소문이 나서 저쪽 동네에서도 선원만 없으면 여기로 와요, 다방으로.”
- 이미애 (52, 다방 주인) -
[사진=KBS 제공]
/서경스타 전종선기자 jjs7377@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