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준의 맛이 장점이던 시절이 있었다. 낯선 곳에 가도 그 간판, 그 가게를 찾아가면 늘 먹던 그 맛을 낸다. 초행길 낯선 발걸음을 잡기에 이만한 장점이 어디 있는가. 하지만 표준의 맛은 뒤집어 보면 특색도 희소성도 없다. 지금 이곳이 아니어도 맛볼 수 있는 경험의 표준화는 프랜차이즈의 장점이자 단점이다.
20편의 장편을 펼쳐내면서 홍상수 감독의 영화는 비슷한 맛을 내는 프랜차이즈가 됐다. 영화감독이나 문인 등 식자층의 남성을 등장시켜 그의 뻔뻔스러움과 편협함을 비웃고 그가 공들이는 젊은 여성들은 하나같이 엉뚱하고 순수해 남성 캐릭터의 치졸함을 부각하는 기능을 한다. 이야기의 분자가 달라져도 결은 다르지 않다. 솔직하다 못해 뒤통수를 휘갈기는 듯한 통속적인 대사가 실소를 뿜게 하고 영화관을 나설 때면 ‘이게 바로 홍상수지’ 하고 무릎을 치게 하는, 그 비틀기의 맛은 오늘의 홍상수를 만든 토대요 재료다.
제70회 칸 영화제 스페셜 스크리닝 부문에 초청됐던 영화 ‘클레어의 카메라’ 역시 홍상수표 공식을 성실하게 따른 영화다. 영화배급사 직원 만희(김민희)는 프랑스 칸영화제 출장 중 “순수하긴 하지만 정직하지 못하다”는 이유로 해고당한다. 그러나 실제 이유는 만희가 배급사 대표 양혜(장미희)의 오랜 연인이자 사업 파트너인 영화감독 완수(정진영)와 하룻밤을 보냈기 때문이라는 사실이 드러난다. 이 세 사람과 연을 맺으며 객관적인 시선으로 이들을 비추는 인물은 음악교사이자 폴라로이드 카메라로 인물 사진 찍기를 즐기는 클레어(이자벨 위페르)다. 완수와 양혜를 우연히 만나 이들을 카메라에 담게 된 클레어는 만희를 만나 해고된 사유를 듣게 되고 만희 역시 카메라에 담기 시작한다. 각자의 언어가 아닌 영어로 소통하며 하루를 함께 보내는 두 사람은 대화를 하고 음식을 함께 나누고, 해고된 날을 되짚으며 서로를 이해하고 치유를 돕는다. 영화의 끝에선 하룻밤 꿈처럼 모든 것이 제자리로 돌아가고 네 사람을 잇던 우연의 협주곡은 잔잔하게 막을 내린다.
홍상수는 2016년 5월 박찬욱 감독의 ‘아가씨’로 칸영화제에 간 김민희와 동행해 이 영화를 찍었다. 두 사람이 불륜을 공식 인정하기 전이었다. 그런데도 이 작품은 두 사람의 사랑에 대한 항변으로 읽힌다. 뭇 사람들의 시선에는 둘의 사랑은 순수한 것은 틀림 없으나 두 사람은 정직하지 못하다. 그래서 이들의 사랑은 다시 또 의심받고 비난의 대상이 된다. 사진을 왜 찍느냐는 만희의 물음에 “무언가를 바꿀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모든 것을 아주 천천히 다시 쳐다보는 것”이라고 답한다. 그리고 완수에게는 “내가 당신을 찍고 난 후에는, 당신은 더 이상 같은 사람이 아니다”라고 말한다.
홍상수가 관객에게, 세상에 바라는 것은 ‘그저 천천히 쳐다보는 것, 그들의 관계를 덤덤하게 바라봐주는 것’은 아니었을까. 홍상수가 영화를 찍는 이유도 클레어와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다. 자기변호와는 거리가 멀다. ‘그저 나는(우리는) 이런 인간’이라는 토로다. 그래서 그의 영화는 자기복제인듯하면서도 조금씩 나아간다. 그의 뮤즈 김민희와 함께, 뻔하지만 솔직하게. 25일 개봉
/서은영기자 supia927@sedaily.com, 사진제공=영화제작 전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