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랑가 지도가 바뀐다. 최근 갤러리들의 이동이 ‘한남 시대’를 예고하고 있다.
종로구 인사동에서 시작해 삼청동과 북촌·서촌으로 확장된 강북 화랑지구, 신사동 가로수길에 활력을 더하고 청담동 등지로 뻗어 간 강남 화랑가가 이제는 용산구 한남동을 주목하기 때문이다.
젊고 참신한 작가를 소개할 예정인 가나아트 한남. 평창동에 이은 분점 격이다. /사진제공=가나아트갤러리
젊고 참신한 작가를 소개할 예정인 가나아트 한남. 평창동에 이은 분점 격이다. /사진제공=가나아트갤러리
국내 최정상급 화랑인 가나아트가 평창동 본관과 별도로 용산구 대사관로에 ‘가나아트 한남’을 25일 개관했다. 다음 날인 26일에는 세계 3대 경매회사인 필립스 한국지사가 같은 건물에 문을 연다. 공교롭게도 이들이 나란히 둥지를 튼 ‘사운즈 한남’은 지난달 카카오가 지분 전량을 사들인 것으로도 유명한 브랜드 디자인기업 JOH가 기획한 건물로 갤러리와 경매회사 외에 레지던시, 유명 레스토랑, 베이커리 등이 입점했다.
한남동 일대를 비롯한 용산구가 ‘예술특구’로 부상한 것은 강남과 강북으로 손쉽게 연결되는 접근성, 맛집과 멋집을 두루 갖춘 이태원·해방촌 등 지역의 젊은층 유동인구가 가장 큰 요인이다. 유엔빌리지, 한남 더힐 등 고급주택단지에 부촌(富村)이 형성됐고 하얏트와 신라호텔이 지척이라 외국인부터 신흥 부유층이 자주 오가는 곳이기도 하다. 미술 컬렉터층의 세대교체도 한몫했다. 60대 이상 전통 컬렉터층에 이어 그들의 자녀세대인 3040이 미술계의 주요 소비층으로 부상했으며 젊은 감각을 유지한 50대 또한 참신함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미술품과 핀란드 디자인 가구 등을 함께 선보이는 갤러리이알디(ERD), 감각적인 프로젝트 전시를 꾸리고 있는 P21 등이 호평받는 중이다. 청담동에 있던 박여숙화랑과 신사동 가로수길의 어반아트 등도 인접한 용산구 소월길 부근으로 이전을 계획하고 있다.
이영주 페이스갤러리 디렉터는 “관광과 쇼핑 목적으로 지나던 관람객들이 몰리듯 들르는 것과 달리 한남동은 이 지역을 찾는 사람들의 특성과 마찬가지로 진지하게 전시를 보려고 오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고 귀띔했다. 세계 최고의 화랑 중 하나로 통하는 페이스갤러리 역시 지난해 3월 한국 전시장을 열면서 한남동을 택했다.
이 지역에 먼저 자리 잡은 화랑으로는 표갤러리와 백해영갤러리가 ‘터줏대감’이지만 2004년 10월 삼성미술관이 개관하면서 ‘아트벨트’의 구심점이 됐다. 인근 지역 재개발과 맞물려 작고 노후한 공간을 되살리는 예술 공간이 생겨났고 2013년에는 대안공간 성격의 ‘아마도예술공간’이 문을 열었다. 대림미술관의 실험적 분관인 ‘구슬모아당구장’은 실제로 옛 당구장을 전시장으로 개조했다. 2015년 말 개관한 디뮤지엄은 통의동 대림미술관이 갖는 정돈된 느낌과는 전혀 다른 분위기로 관객을 끌어모았고 젊은 취향의 참신한 전시 외에도 사진촬영을 허용한 SNS입소문 등이 가세해 3년이 채 되지 않아 관람객 100만 명을 가뿐히 넘겼다. 이후 개관한 ‘현대카드 스토리지’ 역시 전통적인 미술관 개념에서 탈피해 마치 뉴욕의 갤러리를 떠올리게 하는 세련된 구성으로 명소가 됐다. 지금은 세계미술계가 가장 주목하는 작가 중 하나인 오스트리아 출신 작가 에르빈 부름의 국내 첫 개인전을 열고 있다.
이정용 가나아트 대표는 “평창동과는 성격을 달리해 보다 새롭고 실험적인 공간을 추구하며 신진작가 발굴 및 프로젝트 전시를 진행할 계획”이라며 “소통 중심의 미술공간으로 도심 속 현대인들에게 휴식과 새로운 자극을 제공하는 공간이 되도록 할 것”이라고 말했다. 윤유선 필립스 경매 디렉터 역시 “강남·북에서 부담없이 올 수 있는 입지가 가장 중요했다”면서 “미술시장의 축이 아시아로 옮겨오면서 특히 한국은 세련된 현대미술로 알려진 편인데 그 같은 분위기와도 잘 맞고 한국 작가를 발굴해 외국 미술계 관계자들에게 소개하려는 취지까지 두루 고려했을 때 적합한 곳”이라고 말했다.
한편 삼성미술관 리움이 상설전시는 계속하나 기획전을 중단해 사실상 개점휴업 중인 대신 신용산역 아모레퍼시픽 신사옥에 미술관이 개관하면서 한남동을 중심으로 아모레퍼시픽미술관부터 디뮤지엄까지 거대한 용산 아트벨트를 그리게 됐다.
/조상인기자 ccsi@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