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전자 구미 사업장 직원들이 불량무선전화기에 대한 화형식 전 해머로 제품을 부수는 모습. /사진제공=삼성전자
1994년 3월 9일. 삼성전자의 구미 사업장 운동장에 2,000여명이 모였다.
이들은 불량제품 화형식에 참석한 삼성전자 직원들이었다. 운동장 한가운데 휴대폰, 무선전화기, TV, 팩시밀리 등 15만대에 달하는 삼성의 제품들이 수북이 쌓여 있었다. 진행자가 신호를 보내자, 해머로 제품들을 때려 부수고는 불을 붙였다. 모두 500억원치에 달하는 제품이었지만 이날 모두 잿더미가 돼 시꺼먼 연기 속으로 사라졌다. 이건희 회장은 직원들의 안이한 사고방식을 근본적으로 바꾸고 싶어 했다. 직원들은 하자가 발생하면 그걸 숨기려 했고 발각이 되면 그걸 면피하기 위한 임시변통에 급급했다. 질(質) 경영을 소리 높여 외쳐왔음에도 현장 부서의 변화는 더뎠다.
그래서 충격 요법을 통해 조직이 정신을 차리도록 만들겠다는 생각으로 나온 게 이 불량 제품 화형식 퍼포먼스였다. 아무리 말로 설득해도 안 먹히니, 직접 눈으로 보여주겠다는 것이다. 눈으로 보면 생각과 행동이 달라질 것이란 극약 처방이었다.
한상범 LG디스플레이 부회장이 지난 26일 경기 파주 사업장에서 폐(廢) LCD 모듈을 망치로 깨부수는 모습. /사진제공=LG디스플레이
최근에는 한상범 LG디스플레이 부회장이 나섰다. 지난 26일 경기 파주 사업장에서다. 55인치 폐(廢) LCD 모듈을 한 부회장이 직접 망치로 깨부쉈다.
여러 의미가 있었다. 현재 LG디스플레이는 위기다. 중국발(發) 액정표시장치(LCD) 패널 가격 하락 여파로 올 1·4분기 실적이 6년 만에 적자로 돌아섰다.
그래서 비상경영체제를 선언하고 비즈니스의 무게중심도 차세대 디스플레이인 유기발광다이오드(OLED)로 옮겼다. 중국 업체 진입으로 수익성이 훼손된 LCD 시장에 머무르지 않고 기술격차가 벌어져 있는 OLED 시장에 집중하겠다는 전략으로 볼 수 있다. 그런 맥락에서 55인치 폐 LCD 모듈 격파 퍼포먼스는 회사의 현재와 미래를 두루 상징했다. LCD라는 ‘현재의 한계’에 갇혀서는 ‘미래(OLED)’를 열 수 없다는 의미였다. 한 부회장은 이날 “거센 강을 건너고 있고 우왕좌왕하면 휩쓸려 떠내려갈 것”이라고 “긴장감을 가지라”고 다시금 강조했다는 후문이다.
지난 2001년 비용절감과 분발하는 차원에서 잔디 대신 보리를 심었음을 알리는 표지판. /사진제공=LG디스플레이
특히 이날 행사 후 한 부회장은 최고경영자(CEO)들과 함께 월롱산 정상에 올랐다. 여기서 보리 섞인 주먹밥을 나눠 먹으며, 고통분담 및 위기극복 의지를 다졌다고 한다. 사실 LG디스플레이는 보리쌀과 인연이 있다. 지난 2001년 LG디스플레이(당시 LG필립스LCD)는 시설 투자를 늘리기 위해 확보한 부지에 잔디 대신 보리를 심었다. 통상 먼지를 방지하기 위해 잔디를 심지만, 비용절감을 위해 보리를 심기로 한 것. 그러면서 ‘추운 겨울을 견디는 보리처럼, 최악 상황을 이겨 내자’라는 메시지를 전파했다고 한다. 또 수확한 보리에 ‘눈물 젖은 보리쌀’이라는 글귀를 적어 전 임직원에 나눠줬다. 결국 2년 뒤인 2003년 세계 LCD 패널 시장점유율(출하량 기준) 1위에 등극할 수 있었다. 퍼포먼스 자체로 위기를 극복한 것은 아니겠지만, 동기부여와 자극은 충분히 됐을 터다.
경제 단체의 한 임원은 “진정한 위기감을 조성하기 위해서는 때로는 이성보다 감성이 중요하고 때로는 말로 하는 것보다는 현장경험이나 영상 자료처럼 눈으로 보여 줄 수 있는 방법이 더 효과적”이라며 “일종의 충격 요법이 아니겠느냐”고 지적했다. 한 전자업계의 관계자는 “(화형식 등 CEO 퍼포먼스가)올드 해 보이는 것도 사실”이라면서도 “한편으로는 조직 구성원의 인식과 사고를 바꿀 정도의 충격을 주기에는 이만한 것도 없는 거 같다”고 말했다.
/이상훈기자 shlee@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