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스트 판문점선언-김정은 비핵화 속내는]제재 계속땐 내부서 체제 붕괴…베트남식 모델 생각했을 수도

개방 해도 문제 없을 정도 권력 기반 쌓아
외자 유치통해 선대와 다른 노선 구축 포석


지난 27일 판문점 북측 판문각 문을 열고 나온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은 군사분계선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왔다. 문재인 대통령의 손을 덥석 잡더니 깜짝 월경까지 제안했다. 북한을 통해 백두산에 가고 싶다는 문 대통령에게 “우리 교통이 불비해서 불편을 드릴 것 같다. 민망하다”고 말했다. ‘탈북자’라는 우리 측 표현도 사용했다. 체제 자존심에 흠집을 내는 발언을 금기시하는 북한 정권의 특성을 고려하면 이는 파격을 넘어 충격에 가깝다. 이에 더해 핵시설 폐기와 대외 공개까지 약속했다. 북한식 표현대로 ‘만리마 속도전’이다. 이를 두고 남북 및 북미 정상회담을 발판 삼아 어떻게든 정권을 보장받고 경제적 궁핍에서 탈출하겠다는 김 위원장의 절박함이 속도전으로 이어지고 있다고 전문가들은 분석했다. 아울러 집권 6년 동안 권력 기반을 다진 만큼 이번 기회에 핵과 경제발전을 교환하고 베트남식 경제성장을 추구할 것이라는 전망도 나온다.


◇“인민이 허리띠를 졸라매지 않게 하겠다”=2012년 4월 김 위원장은 집권 이후 첫 공개 연설에 나섰다. 이 자리에서 김 위원장은 “인민이 더 이상 허리띠를 졸라매지 않고 번영을 누리게 하겠다”고 약속했다. 외자 유치를 통한 지역개발 등 구체적으로 경제정책 밑그림도 그렸다. 북한에서 장마당이 커지자 일각에서는 시장경제를 경험한 스위스 유학파 출신의 젊은 지도자가 일부러 묵인한다는 분석을 내놓기도 했다. 하지만 김정은 정권은 핵·경제 병진정책에 따라 핵 개발에도 매진했다. 이에 따른 대가는 강도 높은 경제 제재였다. 북한을 ‘악의 축’으로 규정한 미국은 독자 대북 제재까지 감행했다. 김정은 정권의 외자 유치 계획은 무산됐고 해외의 북한 노동자들이 벌어오던 외화 수입도 확 줄었다. 무엇보다 대중 무역 의존도가 높은 상황에서 중국이 제재에 동참하며 북한의 경제 위기감은 확 커졌다. 인민의 번영은 고사하고 경제 사정이 개선되지 않으면 민심 동요로 정권이 흔들릴 수 있다는 전망까지 나오기 시작했다. 집권 초 약속 이행은 물론 정권 안정을 위해서도 핵 대신 남북관계 개선, 국제사회 제재 완화를 이끌어낼 필요가 커진 것이다.

◇선대와 다르다…‘베트남 모델’ 추구?=김 위원장은 지난해 신년사에서 ‘능력이 따라주지 못하는 안타까움’이라는 표현을 썼다. 22일 중국인 교통사고에 대해서는 ‘중국 동지들에게 속죄한다’고 했고 27일 남북 정상회담에서는 북한 경제의 어려운 사정을 직접 언급했다. ‘최고지도자=무오류(無誤謬)’를 주장하는 북한 체제로서는 받아들이기 쉽지 않은 표현이다. 이런 점 때문에 지난 6년 동안 권력 엘리트가 김정은식 통치를 따르는 사람들로 재편됐고 북한 주민들도 김일성·김정일 체재 때와 달리 유연성이 생겼다는 평가도 나온다. 이준혁 국가안보전략연구원 연구위원은 이달 초 열린 북한의 정치행사를 분석하면서 “실력을 기준으로 간부대열을 구성했다”며 “충성심과 능력이 부족하면 아무리 빨치산 후손이라도 권력의 문턱을 넘기 힘든 시대가 도래했다”고 말했다.

김 위원장이 공고한 권력기반 아래 핵과 경제성장 기회를 맞바꾸겠다고 결심했다면 다음 목적지는 어디일까. 북한에 앞서 대외개방에 나섰던 중국이나 베트남·쿠바·리비아 등 사회주의 시장경제 모델을 바라볼 가능성이 크다. 이 중에서도 덩치가 너무 큰 중국과 문화적 이질감이 많은 쿠바·리비아보다는 베트남을 벤치마킹할 가능성이 크다. 남성욱 고려대 통일외교학부 교수는 베트남의 도이모이 정책을 주목했다. 이를 계기로 베트남은 시장경제를 수용하고 미국과 수교했다. 이후 고도의 경제성장을 거듭해 한국의 3대 무역국가로 뛰어올랐다. 남 교수는 “김정일 때부터 북한은 중국식 개방 모델에 관심이 없었다”며 “이보다는 같은 아시아권이면서 규모도 비슷한 베트남을 모델로 삼을 가능성이 크다”고 전망했다.
/정영현기자 yhchung@sedaily.com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