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극단 어린이청소년극연구소가 서울 서계동 소극장 판에서 선보이는 연극 ‘사물함’의 한 장면. /사진제공=국립극단
지금부터 들려줄 이야기는 푸릇푸릇하기보다는 검푸르고 찰랑거리기보다는 축축하기 그지없는 이야기다.
시작은 닫힌 사물함에서 풍기는 알 수 없는 냄새다. 편의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며 여유 시간마다 폐기(유통기한이 지나 처분하는 음식물)를 먹는 모습을 생중계하는 다은(배우 김윤희)의 사물함이다. 아르바이트를 하던 중 창고가 무너져 숨진 다은의 사물함은 자물쇠로 굳게 닫힌 채 친구들에게 냄새로 말을 건다. ‘신경 안 쓰면 안 쓴 티가 나기 마련인 거 같고, 그럼 결국 선택받지 못하는 거’라고 말하는 그 사물함을 친구들은 열지도 외면하지도 못한다. 생애 처음으로 경험하는 죽음과 가난의 냄새는 이다지도 지독하다.
국립극단 어린이청소년극연구소가 서울 서계동 소극장 판에서 선보이는 연극 ‘사물함’의 한 장면. /사진제공=국립극단
다은의 유일한 친구이자 상류계급 진입을 꿈꾸는 연주(배우 정연주), 그리고 다은에게 가끔 담배를 샀던 재우(배우 정원조), 다은이 아르바이트하던 편의점 사장의 딸 혜민(배우 조경란), 편의점이 세를 내고 있는 건물주의 아들 한결(배우 이리) 등 친구라기엔 그리 가깝지 않았던 다은 주변의 아이들, 사회의 축소판처럼 층위를 이루며 다은을 내려다 보았던 아이들은 갑작스러운 죽음, 가난을 목격하며 동요하기 시작한다. 이 과정에서 ‘미성년’이라는 껍데기 안에 숨겨져 있던 그들의 두려움과 고뇌, 치열한 투쟁과 부채의식을 피하기 위한 발버둥이 무대 위에 고스란히 풀어 헤쳐진다. 슬픔이나 애도는 없다. 어리기 때문에 보호받을 수 있다는 특권도, 어리기 때문에 살아남을 수 있다는 희망도 없는 사회의 자화상에서 아이들은 차갑기만 하다.
국립극단 어린이청소년극연구소가 서울 서계동 소극장 판에서 선보이는 연극 ‘사물함’의 한 장면. /사진제공=국립극단
청소년극이라는 테두리 안에 머물기엔 이 작품 속 주인공의 면면은 그저 교복만 입혀놓은 우리의 모습이다. 감정적이고 미숙해 보이지만 이들이 입 밖으로 꺼내놓는 직설적인 말들은 어른들이 습관처럼 내뱉는 폭력의 언어, 치졸하고 냉혹한 선 긋기의 연장선 상에 있다.
국립극단 어린이청소년극연구소가 서울 서계동 소극장 판에서 선보이는 연극 ‘사물함’의 한 장면. /사진제공=국립극단
‘사물함’은 극작가 김지현의 데뷔작이자 극단 ‘여기는 당연히, 극장’을 이끌고 있는 구자혜 연출의 첫 번째 청소년극으로, 국립극단 어린이청소년극연구소는 지난 12월 낭독공연을 거쳐 국립극단 소극장 판에서 본 공연을 선보인다. 세상에 대한 날카로운 풍자와 통찰력을 드러냈던 전작처럼 청소년 극에서도 사회의 민낯을 고스란히 무대 위로 올려놨다.
국립극단 어린이청소년극연구소가 서울 서계동 소극장 판에서 선보이는 연극 ‘사물함’의 한 장면. /사진제공=국립극단
‘나는 과연 살아서 어른이 될 수 있을까’라며 숱한 질문을 던졌던 작가는 어른이 되어 이 글을 썼다.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치는 청소년, 그리고 함께 살아남은 어른들을 위해. 6일까지 소극장 판
/서은영기자 supia927@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