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엔 산하 국제노동기구(ILO)가 모든 종류의 직장 내 폭력·괴롭힘을 금지하는 국제 협약을 논의해 내년 채택할 예정이다. 한국이 이 협약을 비준하려면 국내법을 개정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성폭력 미투(Me too) 캠페인과 한진그룹 오너 일가 사태로 직장 갑질에 대한 논의가 활발한 가운데 새 협약이 ‘직장 갑질 금지법’을 이끌어낼지 관심이 쏠린다.
8일 고용노동부와 ILO에 따르면 ILO 기준설정위원회는 ‘일의 세계에서의 폭력과 괴롭힘 근절’ 협약 초안을 새 국제기준으로 제시했다. 위원회는 협약에 일터에서 발생하는 모든 종류의 육체·성·정신적 폭력·괴롭힘을 뿌리 뽑고 피해 근로자를 지원하는 내용을 담자고 제안했다. 한국을 비롯한 187개 ILO 회원국은 오는 28일(현지시간) 스위스 제네바에서 개막하는 제107차 ILO 총회에서 이 협약을 핵심 의제로 논의한다. 회원국들은 권고보다 구속력 있는 협약 방식에 대체로 동의한 것으로 알려졌다. 고용부 관계자는 “내년 ILO 총회에서 협약이 정식 채택될 듯하다”며 “한국이 비준하려면 협약에 맞도록 법 개정을 해야 할 것으로 예상돼 몇 년이 더 걸릴 수 있다”고 설명했다.
협약에 대해 국내 분위기는 엇갈린다. ILO 위원회가 권고안을 내기 전 각 회원국 노사정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에서 한국 노동계는 협약에 대체로 찬성했지만 정부는 일부 내용에 반대했다. 경영계는 협약 대신 강제성 없는 권고가 좋다는 의견을 냈다. 고용부 설명을 들어보면 협약 내용은 현행 국내법보다 금지 수준이 강해 협약이 만들어진다 해도 법 개정과 협약 비준까지는 상당한 갑론을박이 예상된다. 하지만 협약이 새 국제기준으로 채택되는 것만으로도 입법에 탄력을 받을 수 있다는 전망도 나온다. 올 초 서지현 검사의 성추행 피해 폭로로 불붙은 미투 운동과 조현민 전 대한항공 전무의 물컵 투척 등 연이은 직장 갑질 사건이 불거지면서 이미 관련 법 개정 목소리가 높다.
현재 20대 국회에는 강병원 더불어민주당 의원과 이정미 정의당 의원이 각각 대표 발의한 직장 내 괴롭힘 방지법안 2건이 계류돼 있다. 괴롭힘의 요건을 규정하고 사업주에게 괴롭힘 방지와 피해 근로자에 대한 지원을 강제하는 내용이다. 하지만 여야 정쟁에 휩쓸려 법안은 제대로 논의조차 이뤄지지 못하는 형편이다. 고용부 관계자는 “협약이 나왔다는 소식만으로도 노동·여성계를 중심으로 협약 비준과 법률 개정을 요구하는 여론이 형성될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올해 ILO 총회에서는 ‘일하는 여성’을 주제로 한 통상의제도 다룬다. 국내에서는 김영주 고용부 장관이 연설자로 참석하고 한국경영자총협회·한국노총·민주노총에서 각각 대표를 보낸다.
/세종=이종혁기자 2juzso@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