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픔과 대면할때 상처는 치유된다"…국립극단 올 첫 창작극 '얼굴도둑'

딸의 자살…타살이라 믿는 엄마
가까운 관계서 얻는 흉터 다뤄
신진작가-중견연출 호흡 빛나
"자기 자신과 대면 계기 됐으면"

국립극단의 올해 첫 창작 신작 ‘얼굴도둑’으로 의기투합한 임빛나(왼쪽) 작가와 박정희 연출 /서은영기자

국립극단의 올해 첫 창작 신작 ‘얼굴도둑’으로 의기투합한 임빛나(왼쪽) 작가와 박정희 연출 /서은영기자

국립극단이 올해 첫 창작 신작으로 선보이는 ‘얼굴도둑’은 두 가지 의미로 특별하다. 지난해 국립극단의 창작극 개발 프로그램을 통해 직접 발굴하고 낭독공연을 거쳐 완성도를 높인 작품이라는 점이 첫째, 신진 작가와 중견 연출가가 합을 이뤄 작품을 완성한다는 점이 둘째다.

개막을 하루 앞둔 10일 서울 서계동 국립극단 사무실. 초등학생이 서툴게 그린 얼굴처럼 눈·코·입이 아무렇게나 자리 잡은 연극 ‘얼굴도둑’ 포스터 아래 임빛나(32) 작가와 박정희(60) 연출의 얼굴이 나란하다. 어떤 질문에든 한참을 생각한 후 조근조근 이야기를 풀어내는 젊은 극작가와 군더더기 없고 말씨까지도 단단한 베테랑 연출자의 얼굴에선 각자의 에너지와 생명력이 묻어났다.


‘얼굴도둑’은 가장 작은 단위의 공동체인 가족, 부모-자식 관계에서 빚어지는 폭력이 한 인간과 사회를 어떻게 무너뜨리는지 예리하게 들여다보는 작품이다. 금지옥엽으로 키운 딸 유한민이 죽은 이후 딸의 죽음은 자살이 아닌 타살이라고 믿는 엄마와 이들을 둘러싼 등장인물들의 이야기가 촘촘하게 어우러지며 각자의 존엄을 흔드는 관계의 폭력을 비춘다. 지난해 낭독공연 때도 흡인력 있는 이야기로 평단과 관객들의 시선을 사로잡았지만 그간 임 작가는 평가와 조언들을 그러모아 작품의 토대를 단단하게 다졌다고 한다. 임 작가는 “엄마라는 거울에 비춰 관계의 폭력과 정체성 문제를 다루고 있지만 엄마와 딸의 이야기에 머물고 싶지 않았다”며 “가까운 관계에서 빚어지는 폭력으로 의미를 확장하는데 주안점을 두고 수정작업을 충실히 했다”고 말했다.

스스로를 ‘관념의 세계, 죽음의 문제에 몰입하는 연출가’라고 소개하는 박정희 연출에게 이 작품이 닿은 것은 어쩌면 당연했다. 박 연출은 이 작품에서 결핍을 대면하고 아픔을 겪어야 한다는 사회적 코드를 읽었다고 한다. 박 연출은 “딸의 죽음으로 고통받은 엄마에게 약을 먹여 기억을 지우는 점쟁이 여인처럼, 세월호 유가족에게 우리는 잊어야 한다고, 집으로 돌아가라고 이야기했다”며 “결국 아픔을 극복하는 힘은 대면하고 기억하는 데서 시작된다고 이 작품을 통해 이야기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그는 또 “모든 사람은 나름의 생명력과 주체성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는데 주변 사람과 사회에 의해 우리의 생명력이 어떻게 상실되는지를 성찰할 수 있었다”며 “이 작품은 부모들이 꼭 봤으면 한다”고 조언했다.

모든 등장인물은 각자의 트라우마에 갇혀 있다. 이들 각자의 질환과 숨겨진 드라마를 무대 위에서 표현하는 것은 박 연출의 과제였다. 그래서 전작 ‘간혹 기적을 일으킨 사람’에서도 자문했던 신경심리학자 장재키 박사를 이번 작품에도 초청했다. 누구나 부모·자식 관계에서 크고 작은 갈등을 경험한 만큼 작품 속 이야기가 배우의 개인사와 만나지 않게 하는 데 중점을 뒀다. 캐릭터의 흉터가 배우에게 전이될 수 있는 탓이다. 박 연출은 “장 박사의 도움을 받아 배우들이 주관적인 감정과 연기를 분리하는 동시에 신체를 통해 등장인물의 정서를 표현할 수 있도록 훈련했다”며 “이번 작품을 통해 나 역시 등장인물들의 정서를 탐구하고 신체적으로 표현하는, 새로운 연극적 기법을 시도해볼 수 있다는 점에서 한 단계 성장했다”고 귀띔했다.

임 작가는 신진작가다운 고민도 털어놨다. 그는 “나 자신이 결핍된 인간이다 보니 나의 결핍에서 크게 벗어난 인물을 창조하기 어려운 게 사실”이라면서도 “이 작품은 자전적 이야기가 아닌데도 가족들이 부담을 느낀다는 사실을 최근에 알게 됐는데 나의 부모님은 좋은 분들이라는 점을 꼭 이야기하고 싶었다”며 난감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러나 그간 천착해온 ‘관계’에 대한 이야기를 계속 써내려가고 싶다는 임 작가의 의지는 확고했다. 그는 “나는 표현에 집착하는 사람이라 말하지 못하는 감정들에 이름을 붙여주고 억눌린 감정을 이야기하는 걸 작가적 소명으로 삼고 있다”며 “연극을 통해 관객들이 자신의 감정과 경험을 대면하는 계기를 만들어주고 싶다”며 웃었다. 그러자 박 연출의 응원 메시지가 이어졌다. 박 연출은 “임 작가는 안면인식 장애라는 독특한 소재로 보편적 이야기를 끄집어내며 사회의 의미망을 생산하는 재주가 탁월하다”며 “새로운 영역을 개척해 독보적인 존재가 될 신진작가를 위해 의미 있는 발걸음이 됐으면 하는 바람”이라고 덕담했다. 다음 달 3일까지 백성희장민호극장
/서은영기자 supia927@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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