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밖으로 나서자 맑게 갰던 하늘이 잔뜩 찌푸려 있었다. 정부가 국내 여행 활성화를 위해 내놓은 테마상품인 ‘TV 속 여행지’ 코스를 따라 강원도 원주로 향했다. 첫 번째 코스는 소금산 출렁다리였다. 출렁다리는 드라마에 나온 적은 없지만 설치 후 인파가 몰리면서 뉴스에 여러 번 나왔던 곳이다. 소금산은 작은 금강산이라는 뜻으로 출렁다리 덕분인지 우박이 퍼붓는 날씨에도 등산로에 인파가 줄을 이었다. 산 아래 주차장에서 출렁다리 건너편까지 사람들이 줄을 서 가다 서다를 반복했다. 출렁다리에 도착해서는 비 대신 우박이 쏟아졌다. 내려오는 길에 만난 할머니는 “쏟아지는 우박이 따갑고 아프다”면서도 산을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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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에서 내려와 차에 오르니 하늘 사이로 햇빛이 비쳤다. 2년 전 눈 덮인 겨울에 찾았던 오크밸리는 다른 나라 같았다. 푸르른 신록 속에 버티고 선 세계적 건축가 안도 다다오의 작품 ‘뮤지엄산’의 모습은 여전했다. 뮤지엄산이 이번 이벤트의 무대로 선정된 것은 ‘맥심카누 광고(CF)’의 촬영지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뮤지엄산은 ‘TV에 한 번 나왔다’는 단순한 히스토리가 칭찬이 될 수 없는, 수많은 콘텐츠와 컬렉션을 품고 있는 미술관이다. 안도는 뮤지엄산의 콘셉트에 대해 “‘도시의 번잡함으로부터 벗어난 아름다운 산과 자연으로 둘러싸인 아늑함’이라는 인상을 바탕으로 설계했다”고 밝힌 바 있다. 뮤지엄산은 ‘산상(山上)’이라는 지형에 순응해 웰컴센터·플라워가든·워터가든·본관·스톤가든·제임스터렐관 등으로 이어지는 전체 길이 700m의 건물로 이뤄져 있으며 ‘박스 인 박스(Box in Box)’ 콘셉트로 주변 자연과 조화를 이루고 있다.
이날 개방은 하지 않았지만 뮤지엄산에서 빼놓을 수 없는 상설 전시로는 제임스 터렐전도 빼놓을 수 없다. 제임스 터렐은 대학에서는 심리학과 미술·천문학·수학 등을 전공한 작가로 사물을 인식하기 위한 도구에 머물렀던 빛이라는 매체를 작업의 주체로 끌어올렸다. ‘간츠펠트’와 같은 그의 작품들은 관람자들을 내면의 영적 빛을 마주하는 ‘빛으로의 여정’으로 안내한다는 게 미술관 측의 설명이다. 미술의 새로운 지평을 접해보고 싶은 독자들에게 추천할 만한 전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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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당초 코스에는 들어 있지 않았지만 기자는 혼자 떨어져 나와 토지문화관으로 발길을 돌렸다. 올해가 ‘토지’의 저자 박경리 선생의 10주기인지라 박경리 선생의 딸 김영주 토지문화관 이사장과 차 한잔 하기로 약속을 잡았기 때문이다.
이사장실로 들어서자 박경리 선생과 똑 닮은 김 이사장이 자리에서 일어서며 기자를 반겼다. 토지문화관 현관에 붙어 있는 포스터가 떠올라 “5월5일이 박경리 선생님의 10주기여서 행사가 많겠다”고 물었더니 그는 “그렇지 않아도 하동·통영 등 소설 ‘토지’나 어머니의 자취가 남아 있는 지방자치단체나 기관에서 행사가 잡혀 내일부터는 지방을 돌아봐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고 보니 김 이사장을 만나러 오기 전에 들렀던 ‘박경리문학공원’에도 관련 행사를 알리는 포스터가 붙어 있었다. 원주에는 박경리 선생과 ‘토지’에 관한 두 곳의 시설이 있다. 그중 박경리문화공원은 박경리 선생과 ‘토지’에 관한 콘텐츠를 모아 놓은 박물관 형태고 토지문화관은 젊은 작가들의 창작활동을 지원하기 위한 인큐베이팅 시설 역할을 하고 있다. 김 이사장의 남편은 김지하 시인이고 어머니는 대문호 박경리 선생이다. 기자는 그가 왜 글을 쓰지 않는지 궁금해 이유를 물었다.
“초등학교·중학교 다닐 때 시를 잘 쓴다고 칭찬을 많이 받았어요. 내 글을 보고 어머니가 김동리 선생에게 가져다 봬주고 칭찬을 받기도 했지. 그런데 나는 영악하거든. 글 쓰는 게 사람을 얼마나 망가뜨리는지 알고 있었어요. 난 그게 싫었어. 불행을 겪어본 사람들이 글을 쓰게 마련이야. 나는 불행하고 싶지 않았어요. 그러고 보니 어머니께서 작가가 된 것도 운명적이야.”
‘행복을 갈구했던 그가 누린 삶은 얼마나 행복했을까’ 하는 생각에 미치자 이유 없는 슬픔에 코끝이 시렸다.
/글·사진(원주)=우현석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