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여울 작가
가끔 ‘지나친 존댓말이 우리 사회의 민주적 소통을 가로막는 것이 아닐까’라는 의문을 던질 때가 있다. 할아버지에게도 ‘마이크, 대니얼’이라는 식으로 이름을 부를 수 있는 서양 사람들이 부러울 때도 있다. 적어도 ‘과연 윗사람에게 어떤 존칭을 써야할까’ ‘한 살 차이밖에 안 나는데 꼭 존칭을 써야 할까’ ‘난 재수를 했는데 한 살 일찍 학교 들어온 사람은 나보다 어린데, 내가 그를 꼭 선배로 대접해야 할까’ 같은 복잡한 문제에 시달리지 않아도 되니까. 지나친 존댓말은 확실히 권위주의적인 측면이 있다. 사장이든 과장이든 대리든 상관없이 ‘영어 별명’을 지어 부르는 수평적 기업문화를 시도하는 기업들의 노력은 매우 의미 있다. 사장님을 ‘톰’이라고 정말 편하게 부를 수 있는 회사라면, ‘윗사람’과 다른 생각을 하는 것이 지금처럼 큰 고통은 아닐 테니까. ‘나는 사장님과 다르게 생각합니다’보다는 ‘나는 톰과 다르게 생각합니다’라고 말하는 것이 훨씬 쉬울 테니 말이다.
나의 아버지는 딸들에게 ‘언제든지 반말로, 하고 싶은 이야기를 마음껏 해도 좋다’라고 가르치셨다. 본인이 부모님과 소통하기가 너무 어려워 지독히 외로운 어린 시절을 보냈기 때문에, ‘내가 아빠가 되면 꼭 아이들에게 얼마든지 반말로, 하고 싶은 말 다 할 수 있도록 해줘야지’라고 생각하셨다고 한다.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부모님께 ‘내 마음이 어떤지’ 이야기할 수 없었던 아버지의 한 맺힌 외로움 덕분에, 우리 세 딸들은 엄마아빠와 그야말로 친구처럼 있는 말 없는 말 다 할 수 있게 되었다. 대신 윗사람이나 상사에게 지나치게 예의를 차려야 하는 공간에 가면 마치 ‘물 밖으로 쫓겨난 바다생물’처럼 갑갑함을 느끼게 되었다. 반말로 이야기하면 온갖 자유롭고 창조적인 아이디어가 용솟음치는데, 존댓말로 이야기하면 그 온갖 존칭의 어미와 접두사 등에 신경을 쓰느라 내 생각의 반죽 하나하나를 네모난 벽돌을 만드는 틀에 집어넣어 그 모든 울퉁불퉁한 생각들이 이리 싹둑 저리 싹둑 잘려나가는 것만 같았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고 보니 ‘존댓말이 꼭 필요한 시간’이라는 것이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사람들 사이의 ‘친밀감’도 필요하지만 ‘거리감’ 또한 때로는 인간관계의 평화를 잃지 않게 하는 필수요소라는 것을 이해하기 시작한 순간부터다. 존댓말은 ‘너무 가까워짐으로써 또한 너무 쉽게 상처를 주고받을 수 있는 위험’을 줄여주는 완충제 역할을 하기도 한다. 나는 존댓말만이 줄 수 있는 ‘다정한 예의바름’을 이해하게 되었다. 아무리 오래 만나도 결코 반말을 할 수 없는 관계만이 주는 기묘한 편안함이 있다. 반말만이 품을 수 있는 곰살궂음과 친밀감도 좋지만, 존댓말만이 품을 수 있는 본질적인 거리감과 사려 깊음도 좋아졌다. 얼마 전에 오랫동안 나를 알아왔던 한 출판 편집자로부터 바로 그 ‘존댓말만이 품은 사려 깊은 따스함’을 느꼈다. 그는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여울씨가 언젠가부터 마음의 큰 짐을 덜어낸 것 같아요. 여울씨의 요즘 글을 보고 느꼈어요. 이제 훨훨 날아다녀도 되겠어요.” 나는 그 순간 심장을 관통당한 듯 가슴이 얼얼했다. 아주 친밀한 관계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그는 내 글의 행간에 담긴 내 삶의 함축된 의미를 읽어냈다. 오직 글을 통해 내 마음을 전달할 수밖에 없는 ‘작가’와 ‘편집자’의 관계인 줄로만 알았는데, 그는 아주 멀리서도, 나를 조용히 따스한 시선으로 지켜보고 있었던 것이다. 그에 비해 나는 그의 삶에 대해 별로 아는 것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덜컥 미안해져버렸다. 그는 나를 아주 멀리서도 지켜봐주었는데, 나는 그에게 한 번도 ‘사무적인 관계’ 이상을 기대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날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그의 첫사랑 이야기가 나왔고, 나는 그의 애틋하고 안타까운 첫사랑 이야기를 들으며 ‘이제야 우리가 친해지고 있구나’하는 생각에 뿌듯해졌다. 항상 존댓말을 하지만 ‘이 사람과는 더 친해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드는 사람이 있는가. 그렇다면 그가 바로 당신의 ‘잠재적 베스트 프렌드’임을 기억해보자. 나를 속속들이 다 알진 못하더라도, 나를 아주 멀리서 조용히 지켜봐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아픔의 시간을 버텨낼 수 있다. 당신에게 아주 ‘따스한 존댓말’을 아끼지 않으면서도, 선뜻 다가서기 힘들어하는 사람. 바로 그 한 사람이 당신의 눈부신 멘토임을 잊지 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