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故)다이애나 영국 왕세자비가 아들 윌리엄(아래) 왕세손, 해리 왕손과 함께 찍은 사진 /AP연합뉴스
어린 나이에 어머니를 잃은 ‘반항의 왕족’ 해리 영국 왕손은 아내로 미국인을 선택했다. 백인 아버지와 흑인 어머니에게서 태어난 이혼 경력도 있는 여성이다. 해리 왕손이 고등학교 중퇴 학력으로 유치원 보모로 일했던 자신의 어머니 다이애나 왕세자비를 생각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인지, 외신들은 벌써부터 예비 신부와 세상에 없는 시어머니를 비교하고 있다.
17일(현지시간) 영국의 해리(오른쪽) 왕손와 그의 예비신부 메건 마클의 가면을 쓴 남녀가 결혼식 장소인 영국 윈저궁 근처에서 영국 국기를 흔들며 기뻐하고 있다. 19일 정오에 시작되는 결혼식에는 약 10만명의 인파가 몰려 총 6,000만파운드(약 870억원)의 경제효과가 발생할 것으로 전망된다. /윈저=로이터연합뉴스
해리 왕손의 결혼은 19일 정오(현지시각) 영국 런던 서편 템스강변에 위치한 윈저성 부속 세인트 조지 교회에서 열린다. 세인트 조지 교회는 해리 왕손이 지난 1984년 어머니인 고(故) 다이애나 비의 품에 안겨 침례를 받았던 바로 그곳이다.
신부 메건 마클은 미국인 여배우다. 지난 2016년부터 두 사람의 열애설이 돌자 현지 언론들은 한 목소리로 ‘파격’이라고 전했다. 마클은 백인 아버지와 흑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에 영국인들에겐 외국인인 미국인이다. 여배우 출신이고, 이혼 경험도 있다. 나이도 해리 왕손보다 3살 많다. 영국 왕실에서 ‘미국인 이혼녀’와의 결혼이 처음은 아니지만, 82년 전만 해도 왕위를 버려야 할 정도의 금기였다. 흑인 혼혈 왕족의 역사를 찾아보려면 274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할 정도다. 영국 BBC는 “왕실 입장에서는 이번 결혼이 획기적 사건”이라며 “이는 최근 영국 내 다양한 인종적 배경을 가진 사람이 늘어나는 데 따른 변화를 반영하는 것일 수 있다”고 했다.
영국인들은 마클을 통해 ‘비운의 왕세자비’이자 ‘민중의 왕세자비’인 다이애나비를 떠올리고 있다. 다이애나비는 찰스 왕세자와 결혼해 차남으로 해리 왕자를 낳았다. 다이애나비는 저명한 귀족 가문인 스펜서가 출생이라는 것 외에는 그렇게 눈에 띄지 않는 사람이었다. 부모의 이혼 경력 때문인지 소극적이었고 공부를 못한 탓에 고등학교를 중퇴했다. 태어날 때부터 제1 왕위 계승자였고 케임브리지대를 나온 지식인 왕자님인 찰스 왕세자와는 어울리지 않았다.
다이애나비의 결혼 사진 /위키피디아
하지만 영국인들은 다이애나비를 존경했다. 상당 부분은 결혼 후에도 애인인 카밀라 파커볼스를 정리하지 않은 찰스 왕세자의 뻔뻔함 때문이기도 했다. 파커볼스와의 관계를 정리하라는 다이애나비의 요구를 찰스 왕세자는 거부했다. 파커볼스로 인해 결혼 직후부터 가정생활은 삐걱거리기 시작해 다이애나비는 거식증에 시달리기도 했다. 일각에서는 다이애나비의 웨딩드레스를 파커볼스가 ‘구김이 잘 가는 재질’로 선정했다는 소문까지 돌기도 했다.
다이애나비는 찰스 왕세자의 사랑을 단념하고 세계 여기저기를 누비며 봉사활동을 하기 시작했다. 진정한 영국 왕실의 왕세자비가 되기로 결정한 것이다. 다이애나비는 아프리카 빈민촌 구호와 적십자 활동 등에 많은 시간을 보냈으며, 대인지뢰 제거 활동은 국제 사회의 찬사를 받기도 했다. 남편의 관심을 버리고 국제 사회를 위해 봉사하는 다이애나비를 영국인들은 존경해 마지않았다.
다이애나비를 추도하는 꽃다발이 그가 살던 켄싱턴 궁 앞에 쌓여있는 모습 /위키피디아
교통사고로 36세의 젊은 나이로 다이애나비가 세상을 떠나자 영국인들은 그가 살던 켄싱턴궁과 여왕이 사는 버킹검궁 정문에 다이애나비의 죽음을 애도하는 꽃다발을 쌓았다.
해리 왕손의 신부가 될 마클은 상당 부분 다이애나비와 닮았다는 평가가 나온다. 마클은 그동안 유엔 여성 친선대사로 활동하며 해리 왕손과 데이트하는 동안에도 여권 신장 관련 에세이를 출판했다. 11살 때 힐러리 클린턴 전 국무장관에 편지를 보내 여성을 ‘부엌데기’로 표현한 세제 광고를 바꾸게 한 것도 잘 알려진 일화다. 약혼 후에도 정치적 발언을 삼가는 왕실의 금기를 깨고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에 대해 “여성 혐오자”라고 비판했다.
어린 나이에 어머니를 잃고 반항아로 살다 정신을 차린(?) 해리 왕손의 모습에도 영국인들은 감회가 새롭다고 말한다. 해리 왕손은 마클을 만난 후 파티, 음주, 심한 흡연 등을 멀리하고 건강한 식단과 운동에 공을 들이고 있다. 대마초 파티, 나치 장교 복장 입기, 나체 파티 참석 등 영국 왕실의 ‘사고뭉치’, ‘말썽꾸러기’였던 해리 왕손이 의젓한 신랑의 모습을 갖춰가고 있는 셈이다.
해리 왕손과 마클의 결혼을 앞두고 국제 사회는 다이애나비의 부활을 소망하고 있다. 미국 ABC방송은 ‘어떻게 메건 마클은 다이애나비의 유산을 이어갈 수 있을까’라는 기사에서 “마클은 이미 영국 왕실의 벽을 깨기 시작했다”고 평가했다.
/변재현기자 humbleness@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