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파식적] 하이퍼 인플레이션

“오늘부터 짐바브웨 달러의 사용을 중단하겠습니다.” 2009년 4월12일 엘턴 망고마 짐바브웨 경제기획개발부 장관의 입에서 폭탄선언이 나왔다. 화폐가치를 지키기 위해 1년 만에 세 차례나 디노미네이션(화폐가치 절하)을 단행했지만 모두 실패한 후 내린 처방이었다. 이후 7년간 짐바브웨는 달러나 유로 같은 외화에 자국의 통화주권을 넘겨야 했다.



짐바브웨의 통화주권 상실은 무지한 통화정책의 결과였다. 로버트 무가베 대통령은 정권을 잡은 후 백인들의 토지를 몰수하고 흑인에게 무상분배해 지지층을 다졌지만 이로 인한 경제 혼란은 피할 수 없었다. 여기에 서방국가들의 제재와 식량난까지 겹치자 화폐를 마구 찍어내는 최악의 선택을 했다. 이로 인해 화폐가치가 폭락하고 물가가 천정부지로 뛰었다. 2008년 7월 짐바브웨의 물가상승률은 무려 2억3,000만%. 세계 최고의 액면가 기록을 갖고 있는 100조 짐바브웨 달러로도 달걀 몇 개밖에 살 수 없었다. 피해는 오롯이 국민들의 몫이었다.

화폐가치의 급락으로 물가가 미친 듯이 오르는 하이퍼인플레이션(hyperinflation)이 짐바브웨에서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1923~1924년 독일의 사례는 더 끔찍하다. 1차 세계대전 패전으로 감당하기 힘든 전쟁배상금을 물어야 했던 독일은 돈을 무제한으로 찍는 손쉬운 방법을 택했다. 결과는 대재앙이었다. 1923년 한 해 물가상승률은 10억배 이상 뛰었다. 가격이 초 단위로 오르는 탓에 독일인들은 임금을 받자마자 단거리 선수처럼 시장이나 잡화점으로 쏜살같이 뛰어가야 했다. 전 세계를 참혹한 비극의 현장으로 몰고 간 아돌프 히틀러는 이러한 하이퍼인플레이션을 먹고 태어났다.

한동안 모습을 감췄던 하이퍼인플레이션이 다시 고개를 내밀었다. 이번에는 중남미 베네수엘라다. 베네수엘라의 물가상승률은 2016년 600%, 지난해 4,000%가 넘더니 올해는 4월24일 현재 연율 기준 1만6,000%에 육박하고 있다. 연말에는 10만%가 넘을 것이라는 암울한 전망도 나오는 판이다. 우고 차베스 정부가 1920년대 독일이나 2008년 짐바브웨의 전철을 답습한 결과다. 여기에 포퓰리즘 정책 남발과 서방국가들의 경제제재까지 겹쳤으니 경제가 좋아질 리 없다. 정부의 잘못된 선택이 언제나 국민들을 비극의 피해자로 만든다는 역사의 교훈은 오늘도 반복되고 있다. /송영규 논설위원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