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조건 온도만 낮추면 시원?...'에어컨 120년 고정관념' 깨진다

냉매 기화해 온도 낮추는 기존 방식
전력 소모 많고 냉방병 등 부작용도
KIST, 습기 제거에 초점 맞춘
차세대 에어컨 '휴미컨' 선봬
고분자 제습 소재로 필터 개발
흡습성 5배 높고 항균효과 탁월


호흡기가 약한 친정 부모님과 초등학생 자녀 둘을 둔 직장인 김여름(39·가명)씨는 벌써부터 올여름을 어떻게 날지 걱정이다. 지난해 남편을 제외하고 식구들이 감기·몸살·권태감을 느끼는 냉방병으로 고생한 기억 때문이다. 김씨는 “지구온난화로 여름이 길어져 5월 말만 되면 사무실이나 식당·쇼핑몰을 가리지 않고 에어컨을 틀기 시작하는데 냉방병에서 자유로운 에어컨이 없을까 궁금하다”고 말했다.

지난 1902년 미국의 윌리스 H 캐리어가 개발한 에어컨은 온도를 많이 낮춰야만 습도가 제거되는 원리여서 오래 쐬면 노약자나 여성은 물론 호흡기가 약한 남성도 냉방병에 노출되기 쉽다. 그런데도 아직까지 대부분의 에어컨이 캐리어 방식을 따르고 있다. 가전 업계의 한 관계자는 “당시 인쇄소에서 일하던 캐리어는 여름마다 높은 습도로 인쇄물이 제대로 나오지 않자 냉매의 압축팽창 원리를 이용해 온도를 낮춰 습도를 조절했다”며 “오늘날에도 에어컨 원리는 대동소이하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 도시에너지연구단이 120년 가까이 지속된 에어컨의 고정관념에 반기를 들었다. 에어컨은 냉매를 기화해 온도를 낮춰 부수적으로 습기를 제거한다는 개념에서 탈피해 우선 습기 제거에만 초점을 맞춘 것이다. 끈적끈적하고 축축한 습기를 제거하면 온도를 낮추지 않아도 불쾌지수를 대폭 낮춰 쾌적한 실내환경을 유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대영 KIST 도시에너지연구단장은 “에어컨 역사가 116년이나 됐지만 ‘왜 에어컨 업체들이 온도를 낮추는 게 우선이고 정작 더위의 원인인 습도 제거는 부차적으로 다룰까’ 하는 의문을 품어왔다”며 “역발상으로 패러다임 시프트를 통해 신기술을 선보이게 됐다”고 밝혔다.


이를 위해 KIST는 폴리아크릴레이트 등 고분자 제습 소재를 활용한 신소재 필터를 개발하고 습도를 낮춰 쾌적한 환경을 조성하는 차세대 에어컨(휴미컨·HumiCon)을 선보였다. 연구원 창업기업인 휴마스터를 통해서다.

신소재는 실리카겔 등 기존 제습기 소재보다 흡습성이 5배나 높은데 KIST가 10만번을 반복시험해도 성능이 그대로 유지됐다. 기존 에어컨에는 없는 탈취·항균·항곰팡이 효과도 99.8~99.9%에 달하는 것으로 건설생활시험연구원 시험에서 나타났다. 휴미컨을 쓰면 냉방병에도 걸리지 않고 에너지 효율도 갑절 이상 높아져 전기료가 절반 이하로 줄었다. 벽에 설치해 실내 환기 효과도 거두고 전기집진식 미세먼지 제거 필터를 추가 부착하면 미세먼지와 오존 제거 효과까지 볼 수 있다.


이에 따라 연 200조원가량으로 추정되는 국내외 주택·건물·산업용 에어컨을 앞으로 적지 않게 대체하거나 보완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가 나온다. 신소재도 습기 제거가 필요한 벽지, 옷장·신발장·냉장고, 포장·보관, 박물관 수장고, 마스크용으로 다양하게 활용될 것으로 전망된다.

KIST와 태양열 냉방기술을 공동 연구하는 홍희기 경희대 기계공학과 교수는 “국토교통부가 태양광발전으로 에너지를 공급하고 단열을 대폭 강화해 냉난방비를 절감하는 제로하우스를 늘리고 있으나 습기 문제를 해결하는 게 과제”라고 말했다. /고광본 선임기자 kbgo@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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