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요배 ‘봄잠’
갸르릉거리며 졸고 있는 검은 고양이 옆에 엎드린 동글동글 샛노란 것들이 같이 잠든 병아리인 줄 알았다. 곰곰이 다시 보니 잘 익은 감귤들이다. 어떤 이는 망고라고도 했지만 그 노란 것의 정체는 그리 중요한 게 아니다. 따뜻하고 평화로워서 느긋하다 못해 노곤해진 봄날의 한 때, 그리하여 깜빡 빠져들고 만 여유로운 시간의 느낌이 분명하니 말이다. 그 여유로운 온기로 탱글한 과일마저 부드러운 털짐승처럼 느껴졌으니 그림의 전달력은 분명하다. ‘제주 화가’ 강요배의 근작 ‘봄잠’이다.
작가가 눈으로 경험하고 마음으로 포착해 거침없는 붓질로 담아낸 아름다운 세상들이 전시장에 펼쳐졌다. 종로구 삼청로 학고재갤러리에서 다음 달 17일까지 열리는 개인전 ‘상(象)을 찾아서’에서다. 제목의 ‘상’은 ‘코끼리 상’이며 형상·인상·표상·추상 등 ‘이미지’를 가리킨다. 제주를 비롯한 자연에서 포착한 풍경화가로 유명한 그가 신작들 앞에서 “(내가 보기에) 내 그림은 추상”이라고 했다.
작가 강요배
“진정한 추상(Abstract)는 애매하게 그리는 것, 기하학적으로 그리는 것이 아니라 향수를 추출하듯 핵심적인 것을 끌어내고 정수를 뽑아내는 것입니다. 그림이란 인상을 ‘명료화시키는 것’이니까요. ”
출품작 대부분은 제주의 풍광을 담고 있다. 한라산 정상의 설경을 가로 333.5㎝, 세로 197㎝의 캔버스에 그린 대작 ‘항산(恒山)’은 화가의 제주 작업실 마당 동쪽에서 본 풍경이며, 눈보라 휘날린 다음 날 맑게 갠 산을 담고 있다. 전날 무슨 일이 있었건 산은 항상 신비로운 아름다움을 뿜어낸다. 그 큰 화면의 절반은 푸른색 그늘의 설산이고 위쪽 반은 산과 구름 사이의 하늘이다. 늘 그곳에 있어줘 고마운 산의 존재감이 겸허히 드러나니 작가가 느낀 한라산의 정수만 응축했다. 계절이 겨울이건 봄, 여름이건 가을이건 꼭 저 모습일 것만 같다.
파도가 바위를 치고 오르는 장면을 그린 ‘치솟음’이나 볕이 줄고 서리가 내리기 시작하는 상강(霜降) 무렵 석양을 그린 ‘상강’, 높은 가을 하늘을 그린 ‘천고’ 역시 작가의 심상을 꿰뚫고 들어온 자연의 자락에서 핵심만 보여준다. 때로는 그림에 자신의 감정이 담길까 두려운 순간도 있었지만 가능한 한 절제했다. 거칠지만 노련한 붓질은 속도감은 물론 소리까지 담아내는 듯하다. 오랜 시간에 의해 결이 만들어진 그림의 질감은 고분 벽화를 떠올리게 할 정도로 탄탄하다.
강요배 ‘춘색’ /사진제공=학고재갤러리
1952년생인 강요배의 아버지는 1948년의 제주 4·3항쟁을 몸소 겪었다. 육지에서 온 토벌대는 빨갱이 색출에 혈안이 돼 지목된 사람뿐 아니라 이름이 같은 사람까지 모조리 함께 처형했다. 순이·철이 같은 흔한 이름의 사람들은 이유도 모른 채 억울하게 죽어 나갔기에 아버지는 절대 남들이 비슷하게 지을 수 없는 이름 글자를 찾아 요나라 요(堯)자에 북돋을 배(培)자를 써서 아들 강요배의 이름을 지었다. 이처럼 제주 땅의 역사를 벗어날 수 없는 강요배는 제주의 역사화와 풍경화를 주로 그린다. “10년 넘게 고산자 김정호처럼 발품 팔아가며 그린 풍경”이 이번 전시에 선보이고 이어 6월 22일부터 7월 15일까지는 ‘메멘토, 동백’이라는 주제로 강요배의 역사화만 모은 대규모 전시가 같은 곳에서 2부 개인전 격으로 열린다.
/조상인기자 ccsi@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