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파식적] 피나무


하늘의 신 제우스가 어느 날 인간의 모습으로 변신해 마을을 찾았지만 사람들로부터 온갖 냉대를 받았다고 한다. 다만 필레몬과 포시스라는 가난한 노부부는 정성을 다해 식사를 대접했고 감동한 제우스는 이들을 신전 관리자로 임명하면서 소원 한 가지를 들어주겠다고 약속했다. 두 사람의 마지막 바람은 죽을 때도 똑같은 시간에 함께 세상을 뜨는 것이었다. 그들은 소원대로 포시스는 피나무로, 필레몬은 참나무로 변해 서로 나뭇가지를 맞댄 채 언덕에 서 있게 됐다. 피나무와 참나무가 사이좋은 부부를 상징하는 연리목(連理木)의 유래를 담은 그리스 로마 신화의 한 토막이다.


피(皮)나무는 우리나라 중부와 북부 지방의 계곡, 산록 지대에서 자생하는 낙엽성의 나무다. 주로 해발 100~1,400m 정도에서 자라는데 6~7월에 피는 꽃은 독특한 향기를 품고 있다. 한창때는 꽃이 핀 나무의 옆을 스치기만 해도 꿀 냄새를 맡을 수 있을 정도로 향이 좋아 ‘비 트리(bee tree)’라는 애칭도 갖고 있다. 피나무의 속껍질은 질기고 섬유질이 풍부해 끈이나 밧줄·그물을 만드는 데 많이 쓰였고 나무 이름도 이런 껍질의 뛰어난 이용가치에서 붙여진 것이다.

피나무는 가벼우면서도 치밀하며 가공이 쉬워 예로부터 함지박·소반·궤짝 등 생활용품을 만드는 데 많이 사용됐다. ‘조선왕조실록’을 보호하는 궤짝도 대부분 피나무로 만들어졌을 정도다. 고산 김정호는 ‘대동여지도’를 정확하게 만들기 위해 목판에 지도를 새겼는데 여기에 사용된 것도 수령 100년 정도인 피나무였다. 그는 미천한 신분에 돈이 없어 목판을 구하느라 피나무를 벌목하다 고초를 겪은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당시만 해도 전통 판화에 쓰이지 않던 피나무의 선택은 반란에 가까웠다니 그의 혁신정신이야말로 단연 돋보이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우리나라에서 둘레가 가장 큰 나무로 설악산의 피나무가 선정됐다는 소식이다. 산림청 국립수목원에 따르면 줄기가 여러 개인 ‘복간목’ 가운데 설악산의 피나무는 가슴 높이 둘레만 11.13m에 달하는 것으로 조사됐다. 또 한라산의 구실잣밤나무(9.91m), 울릉도 성인봉의 너도밤나무(9.47m)도 큰 나무의 반열에 올랐다. 오랜 세월 모진 풍파를 겪어온 피나무가 대한민국의 큰 나무로 오래오래 남아 우리를 지켜주기를 바란다. /정상범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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