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 정부 구성의 사실상 유일한 선택지였던 오성운동과 동맹 간 연정이 무산되면서 유럽을 뒤덮은 정치 리스크가 한층 짙어졌다. 미국과의 무역갈등으로 가뜩이나 유럽 경제가 타격을 받는 상황에 유로존(유로화 사용 19개국) 3대 경제국인 이탈리아의 무정부 상태가 장기화하며 시장 불안을 부추기자 시장에서는 유럽중앙은행(ECB)이 예정된 긴축 일정을 늦출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분석이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세르조 마타렐라 대통령(오른쪽) 대통령이 28일(현지시간) 카를로 코타렐리(왼쪽) 전 국제통화기금(IMF) 재정국장을 차기 총리 후보자로 지명하고 새 정부 구성권을 위임했다고 보도했다. 의회가 자신들이 추대한 총리 지명자가 아닌 코타렐리 전 국장을 신임할 가능성은 적어 외신들은 사실상 이탈리아가 재총선으로 접어들었다고 분석했다.
전날 연정을 통해 정부를 구성하려던 오성운동과 동맹은 유로존 탈퇴론자인 파올로 사보나의 경제장관 임명을 두고 마타렐라 대통령과의 이견을 좁히지 못해 정부구성권을 반납했다. 마타렐라 대통령은 주세페 콘테 지명자와 회동해 이탈리아 금융시장이 출렁거리는 상황에서 사보나에게 경제장관직을 맡길 수 없다고 완강히 거부했다. 이견을 좁히지 못한 콘테 지명자는 곧바로 총리직 사퇴를 발표했다.
코타렐리 전 국장이 이끌 정부는 재총선까지 이탈리아의 내정을 감독할 ‘관리 내각’의 성격이 짙다. 이탈리아 정치권에서는 오는 9~10월 재총선을 유력한 대안으로 보고 있다.
국제사회가 염려했던 ‘서유럽 최초의 포퓰리즘 정권 탄생’이 무산되면서 그동안 줄곧 하락세를 이어온 유로화 가치는 28일 도쿄외환시장에서 반등세로 돌아섰다. 하지만 이탈리아 정세의 불확실성이 더욱 커지면서 유럽 금융시장은 극심한 불안에 빠지게 됐다는 관측이 지배적이다. 특히 최근 여론조사에서 재총선이 치러질 경우 지난 선거에서 17%의 득표율을 올린 동맹의 의석은 더욱 늘어나고 오성운동도 최다 의석을 유지하는 등 포퓰리즘 세력이 한층 강화될 것으로 전망돼 이 같은 관측을 뒷받침한다.
시장에서는 이탈리아 정치 리스크가 초래하는 시장 불안이 도널드 트럼프 미국 행정부의 보호무역주의 행보와 맞물려 유럽 경제 전반에 짙은 먹구름을 드리우며 ECB의 통화정책에까지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우려를 제기했다.
글로벌 경제분석기관 IHS마킷이 집계한 이달 유로존 구매관리자지수(PMI)는 54.1로 4개월 연속 하락해 빠르게 악화하는 기업 심리를 드러냈다. 1·4분기 유로존 경제성장률은 전 분기 대비 0.4%에 그쳐 4·4분기 수준(0.7%)을 크게 밑돌았다. 이는 트럼프 행정부의 보호무역주의로 유럽의 미국 수출길이 불안해진데다 철강·알루미늄 관세 부과 대상이 된 국가들이 미국을 대신해 대유럽연합(EU) 수출을 늘려 현지 철강 업계가 타격을 받은 영향이 크다. 트럼프 행정부가 최근 예고한 대로 수입산 자동차에도 고율 관세를 부과하면 유럽 최대 경제국인 독일의 경제가 직격탄을 맞아 유럽 경기를 본격적으로 끌어내릴 수 있다. 독일 IFO경제연구소는 미국의 수입차 관세가 독일 국내총생산(GDP)에 미치는 악영향이 500억유로(약 63조원)에 달할 것으로 전망했다.
여기에 이탈리아발 금융불안마저 심화하면 ECB가 긴축 시간표를 연기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당장 이탈리아와 독일의 10년물 국채수익률이 200bp(1bp=0.01%포인트) 이상 벌어지는 등 시장이 요동치는 상황에서 ECB가 긴축 액셀을 밟으면 경제불안이 더욱 심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ECB는 다음달 통화정책회의에서 9월로 예정된 양적완화 종료 여부를 검토할 계획이었지만 정치·경제 불확실성이 높아지면서 판단을 7월로 미룰 가능성이 있다. 양적완화 종료시기가 늦춰지면 내년 중반 정도가 유력했던 기준금리 인상도 순차적으로 연기될 수 있다. 25일 유로화 가치가 지난해 11월 이후 최저치인 유로당 1.1714달러에 마감하는 등 시장은 이미 ECB의 긴축 시간표 조정에 대비하는 상황이다.
/변재현기자 humbleness@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