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입적한 설악 무산 스님의 살아생전 말씀을 들으니 제가 품고 있는 예술관과 참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공백을 메우고 채우기보다는 모든 걸 훌훌 벗어던지고자 했던 스님처럼 저의 음악도 정해진 틀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훨훨 날아올랐으면 좋겠습니다.”
한국이 낳은 ‘바이올린 여제(女帝)’ 정경화(70·사진)는 지난 30일 서울 종로구의 한 카페에서 서울경제신문과 만나 “나이를 먹고 나니 이제는 자잘한 연주 테크닉에 일희일비하는 마음이 사라졌다”며 이 같은 소망을 내비쳤다. “사람의 목소리가 세월의 흐름에 따라 바뀌듯이 연주의 디테일도 변할 수밖에 없지요. 물론 관객을 매혹하기 위한 기본적인 실력은 갖춰야겠지만 정말 중요한 것은 내 음악에 삶의 깊이를 담아내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정경화는 오는 3일 서울 롯데콘서트홀에서 자신의 33번째 앨범 발매를 기념한 ‘듀오 리사이틀’을 연다. 피아노 반주는 정경화와 7년 넘게 음악적 교류를 이어온 케빈 케너가 맡는다. 정경화는 스스로 ‘영혼의 동반자’라 부르는 케빈 케너와 함께 이번 공연에서 브람스·포레·프랑크 등의 낭만주의 소나타를 들려줄 예정이다.
세계적인 거장으로 음악사에 굵직한 발자취를 남긴 정경화는 불과 9세의 어린 나이 때 서울시립교향악단과 협연하며 일찌감치 신동으로 주목받았다. 초등학교 시절 단 두 번의 레슨을 받고 학교에서 불러본 모든 노래를 바이올린으로 연주했다는 일화는 지금도 전설처럼 회자된다. 미국 줄리아드에서 이반 갈라미언의 지도를 받은 정경화는 1967년 당시 최고 권위의 미국 레벤트리트 콩쿠르에서 우승을 차지한 이래 50년 넘게 일인자로 군림해 왔지만 음악에 대한 열정은 파릇파릇한 신인 못지않았다. “제가 2005년에 손가락 부상을 당하고 나서 5년 동안 무대를 떠난 적이 있었잖아요. 2010년부터 다시 무대에 올랐지만 이제야 완전히 부상에서 회복된 것 같아요. 부상 이후 악기를 바꿨다가 8년 만에 다시 ‘과르니에리 델 제수’를 꺼내 든 것도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이 바이올린은 아주 섬세하고 치밀하게 조율하지 못하면 결코 아름다운 소리를 내기 힘들어요. 오랜만에 잡은 악기인데도 내 손에 딱 들어오는 게 느껴져요. 이번 공연에서 망신살 안 뻗치고 제대로 연주하는지 한번 지켜보세요.” (웃음)
북한이 고향인 어머니를 둔 정경화는 한반도에 조성된 평화 분위기에 대해서도 상당한 기대감을 드러냈다. 그는 “당장 내가 북한에 가서 공연을 할 기회가 있을지는 모르겠다”면서도 “화해 무드를 타고 남북 교류가 활성화되고 통일까지 되면 우리 민족의 문화·예술 역량에 주목하는 세계인들도 이전보다 훨씬 늘어날 것”이라고 내다봤다.
정경화는 칠순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싱싱한 예술적 감각과 정정한 체력으로 글로벌 무대를 누비고 있지만 후배들은 그를 인생의 ‘롤모델’로 꼽는 데 주저함이 없다. 소프라노 황수미와 피아니스트 조성진·손열음 등 ‘클래식 한류’를 앞장서 주도하고 있는 젊은 연주자들은 하나같이 정경화의 꾸준한 실력과 열정을 본받고 싶어한다. “후배들이 나를 그렇게 생각해주니 고맙죠. 다들 얼마나 잘하는지, 선배로서는 그저 기특하고 자랑스러울 따름이에요. 다만 한 가지만 조언하자면 어느 정도 경지에 올랐다고 멈추지 말고 계속해서 인내를 갖고 노력해서 ‘세상에서 나 혼자만 할 수 있는 연주’를 터득하면 좋겠어요. 젊은 후배들이 50년 후에도 음악에 대해 신비로운 경외감을 가지면서 음악인으로서의 긍지와 보람을 뼛속까지 느꼈으면 합니다.” /나윤석기자 nagija@sedaily.com 사진제공=심주호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