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파식적] 바나나 구하기

1800년대 후반 세계 곳곳에서 거대한 바나나농장을 운영하던 미국계 다국적기업 유나이티드프루트사는 단 한 가지에만 집중했다. 수십 종에 달하는 바나나 품종 가운데 그로미셸이라는 바나나를 대량 생산한 것. 이유는 단순했다. 그로미셸이 가장 달고 맛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이 회사가 대량 생산을 위해 택한 재배법은 뿌리가 있는 나무에 다른 나무의 가지를 붙이는 접목이다. 가장 달고 맛있는 바나나 나무의 가지를 잘라 내 다시 심는 방식이다.



단일 품종의 바나나를 재배하는 것은 경제적 관점에서는 천재적 발상이라고 할 만하다. 하지만 생물학적으로는 상당한 문제가 있었다. 유전적으로 똑같은 단일 품종의 바나나만 재배하는 곳에서는 어느 한 바나나를 공격하는 병원체가 전체 농장에 피해를 입힐 수 있기 때문이다. 병원체가 바나나 하나를 공격할 수 있다면 나머지 모두를 죽일 수 있다는 얘기다. 그 우려는 얼마 되지 않아 현실로 나타났다.


1900년대 들어 바나나 나무를 말라죽게 하는 파나마병(지금은 덩굴쪼김병)이 바나나농장을 휩쓴 것이다. 당시 하늘에서 내려다본 라틴아메리카의 농장들은 불이 꺼진 것처럼 시커멓게 보였다고 한다. 유나이티드프루트가 일군 바나나제국의 핵심이던 과테말라의 바나나농장이 전부 황폐화됐을 정도였다. 하지만 유나이티드프루트는 미련을 버리지 않았다. 병에 저항력이 있는 품종만 찾으면 버려진 땅에 바나나를 다시 심어 제국 부활이 가능하다고 믿은 것.

그래서 개발된 게 캐번디시다. 지금 우리가 먹고 있는 유일한 바나나 품종이다. 결과는 대성공이다. 선배 격인 그로미셸보다 더 큰 수익을 안겨주고 있다.

그러나 위기는 반복되는 것일까. 잠복해 있던 파나마병이 진화하면서 바나나가 또다시 위기에 처했다. 동남아시아·아프리카·중동의 바나나농장은 물론 라틴아메리카까지 파나마병에 노출되면서 바나나 공급망이 위태로운 상태다. 비타민 A와 C가 풍부해 전 세계인이 즐겨 찾는 값싼 영양식, 한 해 글로벌 수출 규모가 130억달러에 이르는 바나나의 멸종을 막으려는 행보가 빨라지고 있다는 소식이다.

영국과 이스라엘·과테말라 등에서 품종 개량 작업이 진행되고 있는 모양이다. 영국의 한 기업은 유전자편집 기술을 활용할 예정으로 투자금 1,000만달러까지 유치했다고 한다. 이런 노력들이 모이면 좋은 성과가 나오지 싶다. 그로미셸·캐번디시에 이은 3세대 바나나의 등장이 기대된다. /임석훈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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