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진선 NH투자증권 100세시대연구소 수석연구원
우치다테 마키코의 소설 ‘끝난 사람’은 직장에서 은퇴한 사람의 이야기다. 명문 도쿄대를 졸업하고 대형 은행에 입사해 승승장구하다가 임원 직전 밀려나 정년을 맞이한 남자가 은퇴 이후 방황한다는 줄거리. 위트 있는 문장에 낄낄대며 읽다가 책장을 넘길수록 얼굴의 웃음기가 사라진다. 아무 준비 없이 은퇴한 후 쓰나미처럼 덮친 남아도는 시간 속에서 새로운 방향을 찾지 못한 채 이유 모를 열패감을 떨치지 못하는 은퇴자, 내가 아닐 수 있을까.
서울시에서 65세 이상 고령층을 대상으로 취미 여가활동을 조사한 결과, 희망하는 여가활용은 국내외 여행(37%)이지만, 실제로는 62.2%가 TV 시청으로 시간을 보낸다고 답했다. 평균 퇴직 나이인 55세의 사람이 80세에 사망할 경우 10만6,872시간이 주어진다. 이 시간을 TV 시청 외에 어떤 의미 있는 시간으로 만들지 적극적으로 고민해야 한다.
말콤 글래드웰은 저서 ‘아웃라이어’에서 한 분야에 전문가가 되려면 1만 시간이 필요하다고 했다. 시간만 따지면 우리는 인생 후반기에 새로운 분야의 전문가가 될 수 있다. 전세계적으로 고령화 추세가 지속되는 가운데, 실제로 새로운 일에 도전해 즐거운 인생을 즐기는 고령자들이 증가하고 있다.
일본에 살고 있는 89세의 니시모토 키미코 할머니는 엉뚱하고 기발한 사진으로 유명해졌다. 할머니는 17년 전만 해도 사진에 전혀 관심이 없었는데, 어느 날 아들의 도움으로 카메라 사용법을 처음으로 익혔고 사진 찍는 재미에 푹 빠졌다. 재미있는 사진 한 장을 건지기 위해 며칠 동안 아이디어를 고심한다고 한다.
이미 유튜브 스타가 된 박막례 할머니. 71세인 할머니는 50년 넘게 식당 일을 하다가 치매 위험이 있다는 의사 진단에 따라 새로운 활동을 시작했다. 유튜브를 통해 다양한 컨셉의 화장법을 공유하며 젊은 세대와 소통하며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몸소 증명하고 있다.
은퇴 이후 당황스러운 점은 갑자기 시간 부자가 된다는 점 이외에도 ‘언제 이렇게 세월이 빨리 갔을까’ 하는 것이다. 20대에는 20km, 60대에는 60km로 질주한다는 시간의 상대적 가속도를 체감하게 만든다. ‘나이가 들수록 왜 시간이 빠르게 갈까’라는 의문은 일찍부터 제기돼 왔고 실제로 과학적인 답변도 가능하다. 새로운 것을 학습할 때나 기분이 좋은 보상이 주어질 때 분비되는 ‘도파민’이 나이가 들수록 감소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질문에 또 다른 답변은 나이가 들수록 기억에 남을 만한 새로운 경험이 줄어들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은퇴 이후 새로운 경험에 도전한다는 것은 성인이 돼 일자리를 구하고 결혼하는 것보다 더 큰 용기가 필요한 일이다. 습관과 사고방식, 라이프스타일이 이미 고착돼 익숙하고 편한 상태를 벗어나는 데 두려움이 앞설 수 있다. 하지만 거창하진 않더라도 낯선 세계를 향해 꿈을 꾸면서 약간의 용기를 내봤으면 한다. 뻣뻣한 몸으로 요가를 시작하거나 생전 처음 보는 악기를 만져보는 것부터가 시작일 수 있다. 새로운 일에 도전하면 새로운 앞날에 대한 기대감으로 시간이 더디 흐를 것이다. 우리의 젊은 날이 찬란했듯 은퇴 이후 10만 시간도 찬란해야 한다. 이 시간을 TV를 보면서 흘려 보낼 수 없는 까닭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