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金시대 거두'였지만 '영원한 2인자'에 머물렀던 故김종필

23일 별세한 김종필(JP) 전 국무총리는 한국 현대정치의 흐름을 이끌었던 ‘3김(金) 시대’ 거두였지만 정작 ‘1인자’의 위치에는 오르지는 못했다. 국회의원, 정당의 당수, 국무총리를 지냈지만 대권과는 인연을 맺지 못했다.

고 김 전 총리가 1962년 중앙정보부장 신분으로 한일 국교수립 등을 논의하기 위해 일본을 방문하고 귀국해 박정희 당시 최고회의 의장(오른쪽)을 만나고 있다. /연합뉴스

2인자로서의 삶은 35세 때인 1961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육군 중령으로서 처삼촌인 박정희 전 대통령의 5.16 쿠데타에 가담하며 그는 정치 전면에 등장했다. 중앙정보부를 창설해 초대 부장을 역임했고 1963년 공화당 창당을 주도했다. 1971년부터 75년까지 4년6개월간 국무총리를 재임하며 ‘박정희 후계자’로서의 꿈을 키웠다.

그러나 5.16 쿠데타 세력간 권력다툼으로 1963년 1차 외유를 했다. 이때 그가 남겼던 ‘자의반 타의반’이라는 말은 아직도 회자된다. 이후 1964년 ‘김종필-오히라 메모’ 사건, 1968년 3선개헌 추진세력과의 충돌 등으로 한때 권력에서 멀어지도 했다.

5공 신군부 등장으로 정치적 위기를 맞았던 그는 그는 1987년 신민주공화당을 창당한 데 이어 13대 대선에 출사표를 던지며 부활했다. 1987년 대선에 4위에 그쳤지만, 이듬해 13대 총선에서 충청권을 기반으로 35개 의석을 확보하며 건재함을 과시했다.


1988년 서울 수유리 아카데미하우스에서 만난 3김. 왼쪽부터 당시 김종필 공화당 총재, 김영삼 민주당 총재, 김대중 평민당 총재. /연합뉴스

하지만 박정희 정권 2인자라는 수식어를 달고 있는 그가 민주화의 바람 앞에서 1인자가 될 수는 없었다. 결국 1990년 3당 합당을 통해 또다시 2인자의 길로 들어섰으며 ‘충청권 맹주’가 됐다. 이는 충청권 지역주의 정치를 심화하는 등 한국정당정치의 후퇴를 상징하는 것이기도 했다.

그는 1992년, 1997년 대선에서 김영삼·김대중 전 대통령과 권좌에 올리는 킹 메이커가 됐다. 김 전 총리는 1992년 대선을 앞두고 3당 합당으로 한배를 탄 YS에 대한 지지를 선언했다.

이후 민자당내 권력투쟁에 밀린 그는 6.27 지방선거를 앞둔 1995년 민자당을 탈당해 자민련을 창당했으며, 또다시 1997년 대권 도전을 선언했다. 하지만 역부족임을 느낀 그는 여야 정권교체라는 명분을 내세워 당시 김대중 후보의 손을 들어줌으로써 ‘DJP 연합’을 성사시켰다.

김종필 전 총리가 지난 4월 18일 신당동 자택에서 자유한국당 이인제 충남지사 후보를 만나고 있다. /연합뉴스

이후 그는 ‘국민의 정부 초대 국무총리’라는 공식적인 2인자의 반열에 올라 외환위기 사태 극복 등 김대중 전 대통령과 ‘콘크리트 공조’를 과시했다. 하지만 내각제 파동, 16대 총선 과정에서 쌓인 권력 1, 2인자 사이 앙금 탓에 2001년 9월 임동원 당시 통일부 장관 해임안 가결로 공조 파기로 이어졌고, 김 전 총리는 정치적 내리막길을 걸었다.

2004년 17대 총선에서 재기를 노렸지만 10선(選) 도전에 실패하며 정계은퇴를 선언하며 2인자 정치인생에 마침표를 찍었다.
/연유진기자 economicus@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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