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나 피페랄 e-에스토니아 쇼룸 매니징 디렉터가 블록체인과 빅데이터를 활용한 에스토니아의 혁신을 소개하고 있다.
에스토니아의 수도인 탈린에서 기업을 경영하는 A(55)씨. 요즘 스트레스에 시달리다 퇴근길에 갑자기 쓰러졌다. 구급차에 실려 병원에 도착하자 의사들은 즉각 그의 병력과 진료 내역, 처방, 혈액형, 알레르기 정보 등을 파악해 긴급대처에 들어갔다. 바로 건강정보가 들어 있는 전자신분증(e-ID) 덕이다. 지난 2002년 시작된 e-ID에는 의료 데이터는 물론 신분증, 운전면허증, 각종 자격증, 포인트카드, 책 대출 기록까지 담긴다. 2012년부터는 모바일 e-ID도 제공되고 있다.
이처럼 에스토니아는 블록체인과 빅데이터를 운영체계(OS)로 삼고 의료·행정·교육·기업 생태계 등을 혁신하는 애플리케이션(앱)을 탑재해 국가를 경영하고 있다. 1991년 소련에서 독립한 뒤 2007년 러시아로부터 대규모 사이버 공격을 받기도 해 개인정보 등 보안 강화에도 주력하고 있다.
◇의료 데이터 디지털 신분증에 담아=태어나자마자 발급되는 e-ID에 담긴 의료 데이터는 IC칩에 블록체인 암호화 기술이 적용돼 위·변조를 막고 있다. e-ID는 2002년 도입됐지만 디지털 건강기록 시스템은 2010년부터 가동에 들어갔다. 보안을 강화하기 위해 에스토니아 E-건강재단이 블록체인 기술을 도입한 것은 2016년이다. 공개키기반구조(PKI)를 통해 데이터의 크기를 축약한 고유 값 등을 블록마다 저장하는 식이다.
거의 대부분의 의료 데이터가 저장돼 의사가 효과적으로 환자를 맞을 수 있다. 구급차와 병원이 연결되면 의식을 잃은 환자의 정보를 호송하는 단계에서 병원이 파악할 수도 있다. 의사가 처방을 내리면 약국에서 e-ID만 보여주면 된다. 병원 간에도 의료 데이터를 공유하지 않는 우리와 대조적이다.
예나 피페랄 e-에스토니아쇼룸 매니징디렉터는 “병원에 가면 의사가 의료 데이터를 보고 어디서 무슨 치료를 받았는지 파악할 수 있다”며 “물론 허가받은 의사만 볼 수 있도록 법적 장치가 마련돼 있고 누가 내 정보를 검색했는지 확인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전자서명만으로 행정업무 처리=e-ID를 통해 공문서를 발급받거나 행정절차를 밟을 때처럼 대부분의 정부 서비스를 전자서명만으로 처리할 수 있다. 국민의 80% 이상이 인터넷을 사용한다. 노인 등 소외층도 맞춤형 교육을 받아 인터넷에 익숙한 편이다. 정부에서 지원금이나 연금을 받거나 보험금을 탈 때도 전자서명으로 가능하다. 정부기관끼리도 정보공유가 비교적 잘돼 있다. 자연스레 막대한 사회적 비용을 줄이며 국내총생산(GDP)의 2%를 절감했다고 에스토니아 정부는 보고 있다. 소련 시절 심했던 공무원의 비효율과 부정부패도 급감했다.
지상철 성신여대 교수는 “전자정부를 우리가 먼저 시작했는데 우리도 블록체인 기반으로 행정을 혁신하는 단계로 나아가야 한다”며 “개헌이나 정부와 지방자치단체의 예산집행 우선순위 등에 대해 탄력적으로 국민투표를 통해 결정하면 효율성이 높아질 것”이라고 말했다. 전자투표를 하면 국회나 지방의회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거나 공무원들이 자신의 이해관계를 앞세울 때 발생하는 ‘대리인 비용’을 줄일 수 있는 셈이다.
◇전자투표로 비용·시간 절감=에스토니아는 2005년 세계 최초로 지방선거에서부터 전자투표를 도입해 현재 30%가량이 투표소를 찾지 않고 유권자의 권리를 행사하고 있다. 국토가 한반도의 5분의1이지만 인구는 수원시(120만명)보다 조금 많은 130만명에 불과해 전자투표가 효과적이다. 투표소 비용을 줄이고 노인·장애인이나 바쁜 사람들이 편하게 이용할 수 있다. 이용률은 연령대나 성별 차이가 별로 없다. 투표일 사흘 전까지 1주일간 사전투표에 적용되는데 투표일까지도 번복할 수 있다. 2014년 미국 미시간대 연구진이 ‘해킹에 취약하다’고 주장하기도 했으나 정부는 소스코드를 공개하며 신뢰성을 확보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최재용 4차산업혁명연구원장은 “우리도 사전투표나 해외에 있는 주재원·교민·학생 등의 부재자투표에 전자투표를 도입하면 효과가 클 것”이라고 말했다.
◇e-스쿨·e-폴리스로 시너지=온라인으로 수업시간표와 진도, 성적, 교사 평가·지도 내용, 연락처를 알 수 있다. 교육의 질·형평성·효율성이 개선되고 공교육의 신뢰가 높아졌다. 초중고에서 서류로 학교 행사나 성적을 알려주고 상당 부분 사교육에 의존하는 우리의 현실과는 다르다. 2012년부터 전 학년 코딩(coding) 교육 의무화, C언어·자바·파이선 등으로 프로그램을 만들어 창의적이고 논리적인 문제 해결 능력을 키워준다. 토마스 헨드리크 일베스 전 대통령은 지난해 방한해 “처음에는 코딩교육 도입에 상당한 저항이 있었다”며 “과거 문맹자가 큰 핸디캡이었다면 이제는 코딩이나 프로그래밍이 기본”이라고 밝혔다.
2005년부터는 e-폴리스 체제로 전환해 경찰이 순찰하다 모바일 단말기로 범죄자의 기록을 열람할 수 있도록 했다. 현장에서 바로 대처해 수배자 검거 실적이 크게 높아졌다. /탈린=고광본 선임기자 kbgo@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