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 포항 한 철강회사 제품창고에 열연코일이 쌓여 있다. 미국 상무부는 최근 한국산 베어링에 대한 덤핑 조사에서 한국산 열연제품을 썼다는 이유만으로 추가 관세를 부과할 수 없다고 결론 내렸다. /서울경제DB
도널드 트럼프 미국 행정부가 한국산 철강을 소재로 만들었다는 이유만으론 보복관세를 매길 수 없다고 결정했다. 자국 완성품 제조업체의 비용 부담을 고려한 판단으로 해석된다. 한국 철강에서 시작된 불이 대미 수출 제품 전반으로 번지는 최악의 상황은 피했지만 아직 안심하긴 이르다는 지적이 나온다.
28일 업계에 따르면 미국 상무부는 한국산 베어링에 대한 덤핑 조사 끝에 한국 철강재가 투입됐다는 이유만으론 추가 관세를 매길 수 없다고 결론지었다. 한국 철강재 가격이 낮게 책정돼있어 이를 가공해 만든 베어링 가격도 왜곡됐다는 자국 업체들의 주장을 일축한 것이다.
한국 철강재를 가공해 만든 제품에 보복관세를 물렸던 이전 판정과 대비된다. 상무부는 이달 초만 하더라도 한국 철강재가 사용됐다며 현대제철이 만든 스탠더드 강관(파이프)에 31%의 보복관세를 매긴 바 있다. 한국 철강 시장을 ‘특정시장상황(PMS)’으로 규정하면서 시작된 일이었다. 상무부는 정부 보조금을 받은 포스코의 중간재(열연)가 폭넓게 유통되는 데다 값싼 중국산 철강재가 대거 유입돼 한국 철강 시장 가격이 왜곡됐다고 보고 있다. 정부가 전기요금을 낮게 책정한 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본다.
언뜻 상반돼 보이는 판단이 나온 이유는 이렇다. 상무부는 한국 철강이 문제가 있는 건 맞지만 이를 사용한 제품에까지 관세를 매기려면 철강이 베어링의 주요 소재인지를 따져봐야 한다고 봤다. 파이프의 경우 열연이 차지하는 비중이 80%를 웃돈다는 점이 확인됐지만 베어링의 경우엔 밝혀지지 않았다는 지적이다. 아울러 철강 가격이 베어링 가격에 얼마나 영향을 미쳤는지도 명확히 규명돼야 한다고 봤다.
업계는 상무부의 이번 판단에 전략적 의도가 들어 있다고 해석하고 있다. ‘한국 철강을 쓰면 무조건 보복관세’라는 판례를 만들어 놓으면 트럼프 정부 입장에서도 부담될 수밖에 없다. 미국 업체들이 한국산 철강이 들어간 다른 제품들까지 마구잡이로 제소하면 이를 받아들이지 않을 방법이 없다. 이 경우 한국에서 소재를 가져다 자동차 등 완성품을 만드는 업체의 피해가 불가피하다.
업계 관계자는 “철못 제조사인 미드콘티넌트 스틸앤드와이어만 보더라도 수입 철강에 대한 관세 부과되면서 원재료인 철강 가격이 급등해 구조조정까지 하는 판”이라며 “무역전쟁의 역풍이 미국 제조업체를 강타하는 상황을 고려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고 추정했다.
다만 아직 불씨는 남아있다. 상무부는 이번 판결에서 소재가 최종재 가격에 미치는 영향을 따져 봐야 한다고 했으나 그 기준이 모호하다. 자의적으로 판단할 소지가 여전히 남아있다는 얘기다. 이 때문에 지금이라도 한국 철강 시장에 찍힌 ‘비정상’ 낙인부터 풀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한 통상 전문가는 “PMS는 법률상 근거가 없는 정치적 판단”이라며 “자국 법률에 따라 판단하는 국제무역법원(CIT)에 호소해선 답이 없다. 세계무역기구(WTO) 같은 국제협의체에 제소하는 방안을 고려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김우보기자 ubo@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