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성근 법무법인 길 대표 변호사
사람들은 수사와 재판이 진실과 정의를 추구하는 절차라고 철석같이 믿는다. 그렇지만 현실의 수사와 재판에서 과연 진실이 규명되고 정의가 실현되고 있을까? 이에 관해 20여년 전 한 선배로부터 “수사나 재판에서 진실이 규명될 가능성은 동전던지기의 확률보다 더 나을 게 없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그런데 그때는 그 말에 별로 공감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한참 세월이 흐른 요즈음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이게 되니, 이 얼마나 안타까운 현실인가?
수사와 재판에는 원초적 모순과 한계가 있다. 우선 재판은 사건의 진상을 전혀 모르는 사람이 사건의 진상을 훤하게 아는 사람을 심판한다는 구조적 모순을 갖는다. 그런데다 사건이 많아 한 사건에 매달릴 수 없는 사람이 한 사건에 오롯이 인생을 건 사람을 심판한다는 한계를 가진다.
그렇다고 수사나 재판에서 추구하는 진실과 정의의 개념은 과연 명확한가? 절대 그렇지 않다. 역사에 이름을 남긴 수많은 현인과 철학자들이 진실과 정의를 규명하려고 수천년을 노력했지만, 뚜렷한 개념정의에 실패했다. 그러다보니 진실과 정의는 시대와 장소에 따라 변하는 개념이 됐고, 힘의 논리를 정당화하는 도구로 이용될 때도 많았다.
그런데다 인간의 의식은 불완전하기 짝이 없다. 인간은 사물의 일부를 볼 수밖에 없기에, 보고 싶은 것만 보고, 원하는 것만 잘 기억하는 인지편향적 본성을 갖고 있다. 이 때문에 한 법정에서 이뤄지는 증인들의 증언이 대개는 서로 다르다. 이를 보면, 수사나 재판이란 어렵고 복잡하며, 소모적인 절차이다(이를 ‘유전무죄 무전유죄’라고 표현하는 사람도 있다). 아무리 잘된 수사나 재판이라 하더라도 이를 통해 밝혀지는 것은 증거와 절차라는 좁은 문틈으로 엿보이는 진실의 쪼가리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우리는 일상생활에서 늘 정의의 문제와 부닥친다. 때문에 ‘미적거리는 앞차에 클랙슨을 누를까? 말까?’, ‘괜히 신경을 거스르는 녀석에게 화를 낼까?, 말까?’, ‘주인에게 종업원의 불친절을 따질까? 말까?’, ‘예쁜 아이를 한 번 쓰다듬어 줄까? 말까?’, ‘그녀(이)에게 과감히 대쉬를 해볼까? 말까?’ 따위의 고민이 항상 끊이지 않는다. 그런데 이 모든 일상의 고민거리는 상대에 따라 오해나 싸움으로 번질 수 있다. 그래서 모든 사람은 수사나 재판으로부터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
그렇지만 수사나 재판은 인간의 일상생활에서 일어나는 모든 사건의 시비를 일일이 가릴 수 없다. 어느 사회든 사람의 일상에서 벌어지는 갈등이나 충돌은 복잡하고 까다로운 수사나 재판보다는 도덕과 상식에 따라 대부분 평화롭게 해결된다. 따라서 도덕과 상식의 사회적 가치는 수사나 재판과는 비교가 안 될 만큼 크고 중요하다.
그런데 우리사회는 도덕과 상식의 가치를 너무 모른다. 그런 나머지 함부로 법을 앞세워 엄벌주의에 빠질 때가 많다. 그렇지만 역사는, 엄벌주의란 범죄예방효과는 별로 없으면서 범죄예비군을 키울 뿐 아니라 시대와 백성의 여망에 따른 사회발전을 가로막는 권력의 도구라는 것을 분명히 보여준다. 권력에 대드는 자에게 삼대(三代)를 몰살하는 혹독한 처벌을 일삼은 권력자치고 정치적 안정을 이룬 예가 없다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양심과 도덕, 상식이 제자리를 지키려면, 법이 설치고 날뛰어서는 안 된다. 법이 설쳐대면 수사와 재판이 난무하고, 그렇게 되면 진실과 정의가 오히려 흐려져 억울한 사람이 늘 수밖에 없다. 수사나 재판이 수많은 사건의 진실을 규명하고 정의를 실현하기에는 원초적으로 역부족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법이 설치지 않게 하려면 무엇보다도 백성들이 법에 과도한 기대나 부담을 주지 말아야 한다. 법이 과도한 기대나 부담을 받을 때, 수사나 재판은 범인을 ‘색출’하는 게 아니라 ‘창출’하는 제도로 변질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우리에게는 수사나 재판이 일반백성의 건전한 상식으로부터 멀리 벗어나지 않도록 단단히 고삐를 죌 책무가 있다. 왜냐하면, 이 나라의 주인은 다름 아닌 우리(백성)들이니까./문성근 법무법인 길 대표 변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