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워치] '호모 헌드레드' 시대, 축복인가 재앙인가?

한국 소득 늘고 의술 발달로
최빈사망연령 90세 돌파 눈앞
'무병장수' 오랜 욕망이지만
소외·빈곤·세대간 갈등 심화
오히려 '디스토피아' 될수도


# 2045년 1월1일. 나는 오늘 여든 살 손자를 하늘나라로 떠나보냈다. 막 걸음마를 떼던 순간이 엊그제 같은데 손자는 어느덧 백발의 할아버지가 돼 생을 마감했다. 손자를 잃은 상실감은 형언할 수 없을 정도로 깊다. 몇 해 전 교통사고로 아내와 아들을 먼저 보냈을 때도 이 정도는 아니었다. 평생 당뇨병을 앓았던 손자는 더는 무의미한 삶을 이어가고 싶지 않다며 안락사를 선택했다. 얼마 전 혁신적인 당뇨병 치료제가 출시됐지만 우리 가족의 경제력으로는 천문학적인 약값을 감당하기 버거웠다. 세상에 홀로 남은 나는 정부의 상실가족지원법에 따라 강제로 요양시설에 입소해야 한다. 주치의는 내년에 130세가 되는 나에게 몇몇 장기만 정기적으로 교체하면 될 정도로 건강 상태가 양호하다고 덕담을 건넨다. 그러나 친구와 가족을 모두 떠나 보낸 나는 이제 행복하지 않다. 모두가 열망하는 무병장수의 꿈을 이뤘지만 생의 마지막에 찾아온 상실감과 허무함이 원망스럽기만 하다.


먼 미래의 일을 가정해본 것이지만 평균수명이 100세를 넘는 ‘호모 헌드레드’ 시대가 그려낼 우리 사회의 슬픈 자화상이다. 장수는 인간의 영원한 욕망이자 염원의 대상이지만 100세 시대가 가져올 세상은 마냥 장밋빛은 아니다. 지금부터 우리 사회가 준비하지 않으면 100세 시대는 축복이 아닌 재앙으로 다가올 수 있다.호모 헌드레드는 지난 2009년 유엔의 ‘세계인구고령화’ 보고서에 처음 등장했다. 보고서는 평균수명이 80세를 넘는 국가가 2000년 6개국에 그쳤지만 오는 2020년 31개국으로 늘어나 인류가 본격적인 호모 헌드레드 시대에 진입할 것으로 내다봤다.


학계에서는 평균수명 대신 사망연령이 가장 집중되는 최빈치(最頻値)가 90세를 넘으면 호모 헌드레드 국가로 분류한다. 한국은 이미 최빈사망연령이 2016년 86세를 넘어섰고 2020년 90세를 돌파할 것으로 전망된다. 100세 이상 노인도 2012년 2,386명에서 2030년에는 1만명을 넘어설 것으로 예상된다.

소득 수준의 향상과 의료기술 발전으로 100세 시대가 성큼 다가왔지만 우리가 마주할 세상은 유토피아가 아닌 디스토피아에 가깝다. 빈곤·질병·무직·소외가 노년층의 새로운 사회 문제로 대두되고 있어서다. 세계 최고령 국가인 일본이 겪고 있는 장수국가의 부작용을 고스란히 답습할 수밖에 없다는 얘기다.

게다가 한국은 일본보다 상황이 더 심각하다. 100세 시대의 가장 큰 문제는 노년층의 경제력이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가 집계한 지난해 한국의 상대적 노인 빈곤율은 45.7%로 압도적인 1위다. 회원국 평균 12.5%의 3배가 넘고 20%대인 2위 그룹과도 현격하게 차이가 난다. 30세에 취업해 60세에 은퇴한다고 가정하면 30년을 벌어 40년 동안 여생을 감당해야 하지만 한국의 연금소득대체율은 OECD 최하위권인 39.3%에 불과하다. 임영철 중앙대 명예교수는 “대표적 ‘노인 대국’인 일본은 일찌감치 대비를 했음에도 노인 범죄와 세대 갈등으로 극심한 사회적 혼란에 직면하고 있다”며 “한국은 고령화 속도가 세계 최고 수준인 만큼 준비 없는 100세 시대는 우리 사회 구성원 모두를 비참한 삶으로 좌초시킬 수 있다”고 말했다.
/이지성기자 engine@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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