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규제에 싹 밟힌 신산업]"동남아 휩쓴 그랩, 한국선 불법딱지"...해외로 눈돌리는 대기업

우버까지 짐싸게 한 그랩, 1년만에 등록 기사수 5배 급증
한국 승차공유 아이콘 풀러스는 규제덫에 갇혀 고사직전
스타트업 투자 나선 대기업들 "돈 있어도 베팅할 곳 없어"

지난달 28일 베트남 하노이 시내에서 한 여성이 그랩 바이크를 이용해 이동하고 있다. 하노이 시내 곳곳에서는 초록색 그랩 티셔츠를 입은 기사들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하노이=한재영 기자




하노이 도심에서 서울경제신문 기자를 태운 3개월차 그랩 바이크(Grab Bike) 기사 투이(26)씨는 “일하고 싶을 때만 호출받아 일하기 때문에 월수입이 고정돼 있지는 않다”면서도 “근무에 자율성이 주어지기 때문에 만족감을 느낀다”고 말했다.

그는 자신이 소유한 오토바이를 그랩에 등록해 돈을 벌고 있다. 투이씨처럼 그랩에 등록한 기사 수는 무려 660만명(에이전트 포함)에 이른다. 1년 전 133만명이었던 것과 비교하면 다섯 배 넘게 불었다.

◇우버 동남아 사업 삼킨 그랩=‘동남아의 우버’로 불리는 그랩은 베트남과 인도네시아 등 동남아 시장을 꽉 쥐고 있는 대표적 O2O(Online to Offline) 기반 차량공유 서비스 업체다. 동남아국가연합(ASEAN·아세안) 가입 10개국 중 라오스와 브루나이를 제외한 8개국의 217개 도시에 진출해 있다. 교통 사정이 좋지 않은 베트남에서는 ‘점유율 80%’를 실감할 수 있을 정도로 도심 곳곳이 그랩 천지다. 세계 최대의 차량 공유업체인 우버는 최근 동남아 사업권을 아예 그랩에 넘겨버렸다.

하버드 비즈니스스쿨 동기생 2명이 지난 2012년 창업한 그랩은 이제 글로벌 기업들의 투자를 유치하는 세계적인 혁신기업으로 진화하고 있다. 일본 소프트뱅크와 중국 디디추싱은 조 단위 투자를 통해 아예 전략적투자자(SI)로 참여하며 그랩 키우기에 나섰다.

◇그랩이 한국에서 사업한다면=그랩 측은 “현재는 동남아 시장에서 입지를 강화할 계획”이라면서 “한국을 포함한 동남아 이외 지역으로 사업을 확장할 계획이 없다”고 공식적으로 밝혔다. 하지만 만약 그랩이 한국에서 사업한다면 가능할까.

스타트업 업계의 한 관계자는 “그랩이 동남아에서 하는 사업은 한국에서는 여객자동차 운수사업법에 저촉되기 때문에 불가능하다”고 단언했다. 이 법은 정부가 허가한 운수사업자 외에는 유상 운송을 금지하고 있다. 버스나 택시가 아닌 일반인이 자신의 차량으로 돈을 받고 목적지까지 함께 가는 것(카풀) 자체가 금지돼 있다.


‘출퇴근 시간’에는 가능하다는 예외조항이 있기는 하지만 서울시는 지난해 이 예외조항을 악용하고 있다며 토종 차량공유 스타트업 풀러스를 경찰에 고발했다. 규제 완화에 대한 기대를 걸고 서비스를 시작한 김태호 풀러스 대표는 최근 사임했다. 현대차는 풀러스와 양대 카풀 업체인 럭시에 투자했다가 택시업계의 ‘불매 움직임’ 등 거센 반발에 결국 지분을 카카오에 넘겼다.

골드만삭스는 글로벌 차량공유 시장이 지난해 39조원에서 오는 2030년에는 305조원으로 급성장할 것으로 보고 있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사업 시도조차 못하는 셈이다. 정미나 코리아스타트업포럼 정책팀장은 “혁신 스타트업을 육성하기 위해서는 규제 하나 해소하고 말고를 떠나 4차 산업혁명 시대에 맞춰 산업의 판을 아예 다시 짜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규제 탓에 매력 떨어지는 韓 스타트업=‘풀러스 사태’가 보여주듯 국내 스타트업의 토양은 척박하기 그지없다. 지난해 맥킨지코리아가 낸 보고서에 따르면 글로벌 상위 100대 스타트업 사업에 국내 현행법을 적용할 경우 13곳은 아예 사업 시작조차 불가능하다. 44곳은 일부 조건을 바꿔야 규제를 통과해 사업이 가능한 것으로 파악됐다. 지난해 7월 기준으로 1년간 투자액 1,160억달러(한화 130조원)로 환산해 분석하면 이 가운데 40.9%는 투자가 불가능한 돈이다.

안타까운 것은 이익집단과 시민단체의 반대에 부딪힌 규제 탓에 국내 대기업들의 눈이 해외로 향하고 있다는 점이다. 현대차와 SK 등이 규제의 덫에 걸려 싹을 틔우지 못하는 국내 스타트업 대신 해외 유망 기업에 투자금을 대고 있다. 현대차는 올해 초 그랩에 270억원을 투자했고 SK는 810억원을 투자했다. 삼성전자는 그랩과 전략적 제휴관계를 맺었다.

임정욱 스타트업얼라이언스센터장은 “현대차와 SK 등 국내 기업들이 뒤늦게 스타트업 투자에 뛰어들었지만 국내에는 마땅한 투자처가 없다”면서 “그랩과 같은 해외로 눈을 돌릴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임 센터장은 “배달의 민족 등 몇몇 스타트업들이 글로벌 투자자들로부터 투자를 유치했지만 이는 상대적으로 규제의 영향을 덜 받는 사업 모델”이라고 평가했다.

김보경 무역협회 연구원은 “최근 이슈가 된 풀러스의 경우 해외에서는 파급력 있는 사업 모델이지만 국내에서는 크게 주목받지 못했다”며 “이런 배경에는 스타트업 자체의 한계와 더불어 국내 규제 탓도 있다”고 말했다.

/한재영기자 jyhan@sedaily.com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