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의 한 금융회사에서 일하는 김우현(43·가명) 팀장은 지난 3월15일부터 4월8일까지 필리핀 불라칸주의 시골 마을인 산라파엘에서 25일간 장기체류 여행을 하고 돌아왔다. 김 팀장이 속한 회사는 올해 초 직원들이 최소 3~4주가량 충분한 휴식을 취하거나 자기계발의 시간을 가질 수 있도록 ‘장기휴가’ 제도를 도입했다. 15년 넘게 사회생활을 하면서 지칠 대로 지친 김 팀장은 장기휴가야말로 격무로 인한 스트레스를 시원하게 해소하고 잃어버린 심신의 건강을 되찾을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했다. 김 팀장은 “목과 허리 디스크로 오랫동안 고생해왔는데 지인이 ‘헬스힐링’ 여행을 추천해 필리핀 시골 마을을 장기 휴가지로 선택했다”며 “하루에 1,000페소(약 2만1,000원) 정도만 내면 도수치료와 카이로프라틱(척추교정 치료) 요법을 활용한 마사지 등을 원 없이 받을 수 있었다”고 만족감을 드러냈다. 그는 “공기 좋은 곳에서 스트레스 없이 한 달 정도 지내고 오니 디스크 증세도 눈에 띄게 호전됐다”며 “사회생활을 하며 방전된 에너지를 충전하고 직장에 복귀하니 업무능률도 쑥쑥 오르는 느낌”이라고 말했다.
낯선 여행지에 장기간 머무르며 지역을 제대로 알아 깊이 있는 여행을 즐기고 몸과 마음의 안정도 얻는 ‘한 달 살기’ 열풍이 확산되고 있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한 달 살기’는 가정주부나 고소득자 등 일부 계층의 전유물로 여겨졌으나 최근 들어 개인의 행복을 중시하는 사회적 분위기와 장기휴가를 권장하는 기업의 노력이 맞물리면서 다양한 세대와 계층의 보편적 여행 트렌드로 자리 잡는 모습이다.
‘시골이나 농촌의 임대형 숙박시설에서 장기체류할 의사가 있는가’라는 물음에 응답자의 74.9%가 “이용할 의사가 있다”고 답할 정도로 우리 국민의 ‘한 달 살기’에 대한 열기는 뜨겁다. 농촌진흥청 국립농업과학원의 조록환 박사가 지난해 전국의 20~69세 성인 1,000명을 대상으로 진행한 이 설문에서 “장기체류할 의사가 있다”는 응답자 중 51.3%는 생활관광형을 선호한다고 답했으며, 치유요양형(25.9%)과 귀농·귀촌준비형(13.9%), 자녀학습형(8.9%) 등이 뒤를 이었다.
삶의 질과 행복을 최고의 가치로 삼는 ‘욜로(You Only Live Once의 앞글자를 딴 용어)’ 열풍 속에서 6일 현재 국내의 한 포털사이트에는 ‘한 달 살기’라는 명칭이 들어간 온라인카페만도 388개에 달하며 이들 커뮤니티를 중심으로 숙박시설과 체류비용 등 다양한 정보가 오가고 있다. 김남조 한양대 관광학부 교수는 “예전만 해도 가정주부가 교육 목적으로 자녀와 함께 ‘한 달 살기’ 여행을 떠나는 경우가 많았다”며 “최근에는 ‘수박 겉핥기’식 관광이 아니라 한곳에 오래 머무르며 자아도 성찰하고 새로운 문화도 경험하려는 여행객들의 욕구가 강해지고 있다”고 설명했다.
KB손해보험·삼성전자 등 기업들도 ‘장기휴가’ 제도를 속속 도입하면서 제주도에 국한됐던 여행지는 필리핀을 비롯해 체코 프라하, 말레이시아 조호르바루, 태국 치앙마이 등으로 다양해지는 모습이다. 하나투어·모두투어 등 대형 여행사들도 관련 상품을 내놓으며 고객 확보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김원섭 고려대 사회학과 교수는 “일과 여가의 균형을 맞추는 게 장기적으로 볼 때 조직의 생산성에도 도움이 된다”며 “남성 육아휴직이 활성화되고 근로시간 단축 제도까지 안착되면 ‘한 달 살기’ 트렌드는 점점 확대될 것”이라고 예측했다. /나윤석·노희영기자 nagija@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