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세영이 9일 LPGA 투어 손베리 크리크 클래식에서 단독 선두로 마지막 18번홀 그린에 올라서며 환호하는 팬들에게 인사하고 있다. 대기록을 세우며 우승한 김세영은 “잘 몰랐던 외국 선수들에게까지 축하 문자가 폭주해서 답장해주느라 정신없다”며 행복해했다. /오나이다=AFP연합뉴스
“식구들이랑 조촐하게 짜장 라면 파티하고 있어요.”
9일 오후 서울경제신문과 전화 인터뷰를 한 여자골퍼 김세영(25·미래에셋)은 “레스토랑이 다 문을 닫아 엄마·아빠와 야식을 먹으면서 숙소에서 자축하고 있다”며 웃었다.
최종 라운드에 늘 빨간 바지를 입어 ‘빨간 바지의 마법사’로 불리는 김세영은 한국시간으로 이날 오전 끝난 미국여자프로골프(LPGA) 투어 손베리 크리크 클래식에서 또 마법을 부렸다. ‘전설’ 안니카 소렌스탐(스웨덴)이 2001년 세운 72홀 최다 언더파(27언더파)를 훌쩍 뛰어넘는 31언더파를 작성한 것이다. 타수로는 257타로 72홀 최소타 기록인 2004년 카렌 스터플스(미국)의 258타(파70·22언더파)를 1타 앞질렀다. 68년 역사의 LPGA 투어에 72홀 역대 최다 언더파, 최소타 기록을 한꺼번에 새겨넣은 것이다. 김세영은 나흘간 이글 1개와 버디 31개, 더블보기 1개를 적는 비디오게임 같은 스코어카드를 제출했다. LPGA와 미국 골프채널은 “김세영이 기록을 완전히 박살냈다(shattered)”며 놀라워했다.
역사의 한 쪽을 장식한 김세영은 “우상 소렌스탐의 기록을 깨다니 믿기지 않는다. 꿈이 이뤄졌다”고 기뻐하면서도 “기록은 깨지라고 있는 거니까 누군가는 깰 것이다. 그게 또 내가 되면 좋겠지만 어찌 됐든 항상 인내심을 가지고 겸손하게, 그리고 늘 감사하면서 선수생활을 할 것”이라고 했다. 그는 2년여 전 소렌스탐과 타이인 27언더파로 우승하기도 했다.
김세영은 미국 위스콘신주 오나이다의 손베리 크리크(파72)에서 끝난 대회 최종 4라운드에서 버디만 7개를 잡았다. 이미 3라운드에 8타 차 단독 선두였던 그는 2위 카를로타 시간다(스페인)를 9타 차로 따돌리며 완벽에 가까운 한 주를 보냈다. 특히 그린 적중률이 나흘간 93%(67/72)에 이를 정도로 아이언 샷이 송곳 같았다. 163㎝의 크지 않은 체격에도 태권도(3단)로 다진 하체 근력 덕에 장타를 날리는 김세영은 이날 평균 드라이버 샷 282야드를 뽐냈다.
LPGA 투어에서 30언더파 이상 치며 우승한 것은 김세영이 최초다. 남자 투어인 미국프로골프(PGA) 투어에서도 72홀 최다 언더파는 2003년 어니 엘스(남아공)의 31언더파(메르세데스 챔피언십)다. 2009년 5라운드 대회인 봅호프 클래식에서 스티브 스트리커(미국)가 4라운드까지 33언더파를 기록하기도 했지만 최종 라운드에서 타수를 까먹었다. 김세영은 4라운드 대회 기준 미국 남녀프로골프 투어를 통틀어 최다 언더파 타이기록을 작성한 것이다. 지난해 5월 로레나 오초아 매치플레이 우승 이후 14개월 만에 통산 7승째를 거둔 김세영은 우승상금 30만달러(약 3억3,000만원)를 받았다. 시즌 상금 64만달러로 13위. 통산 상금 500만달러(약 519만1,500달러)도 돌파했다.
김세영은 2015년 미국 무대 데뷔 시즌에 3승을 쌓는 등 매년 1승 이상씩을 올리고 있다. 통산 6승에서 이번 7승까지가 우승 가뭄이 가장 길었다. “준비를 많이 해도 안 되니까 사실 많이 힘들었다”고 털어놓은 김세영은 “내 안에서 문제를 찾고 고치려 노력하다 보니 이렇게 한꺼번에 폭발하듯 좋은 결과가 찾아왔다”고 했다. 그는 양궁 대표팀 기보배 등을 돕는 김영숙 스포츠심리학 박사로부터 멘탈 트레이닝을 받았다. “선생님의 조언대로 ‘내가 해야 할 것에만 집중하고 끝까지 해보자’. 딱 이 두 가지만 생각하고 쳤어요.” 공식 인터뷰 때 언급한 유튜브 영상 공부도 스윙이 아닌 멘탈 공부였다. 김세영은 “어떻게 하면 내 마음을 다스릴 수 있을지 멘탈 강화에 도움이 될 것 같은 영상은 죄다 찾아봤다”고 했다. 거기서 얻은 결론은 ‘나 자신을 믿어라, 항상 겸손하고 감사하라’였다고 한다.
김세영은 “흐지부지한 선수로 남고 싶지 않다. 위대한 선수가 되고 싶다”고 강조했다. 벌써 미국 4년차인데도 그는 “위대한 선수로 가기 위한 출발선을 이제 막 떠났다고 생각한다. 지금의 자신감을 차분하게 유지하는 게 중요하다”고 힘줘 말했다.
/양준호기자 miguel@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