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미국이 동맹국에 이란산 원유 수입을 중단해달라고 요구한 것으로 알려지면서 국내 정유 업계도 비상이 걸렸다. 가뜩이나 국제원유 가격 급등으로 수익성이 악화한 상황에서 저렴한 이란산 원유 수입이 중단되면 원가 부담이 커질 수밖에 없고 이 때문에 휘발유 등 제품 가격이 상승하면 결국 가격 경쟁력에서 오일 메이저에 뒤질 수 있기 때문이다. 한 정유사 고위관계자는 “이런 악재가 계속되면 국내 정유사들이 하반기 가동률을 낮출 수도 있다”며 “밖에서는 호황이라고 하는데 정작 업계 내부에서는 고민이 많다”고 말했다.
국내 유화 기업은 최근 2~3년간 제품 수요가 증가하면서 역대급 호황을 누렸다. 기업은 해마다 사상 최대실적을 경신했으며 영업이익률이 20%에 달할 정도로 수익성도 좋았다. 하지만 올 들어 상황이 바뀌고 있다. 1·4분기 유화 기업들은 ‘쇼크’라고 불러도 무방할 정도의 성적표를 받아들었다. 물론 여전히 영업이익 규모가 크고 수익성도 나쁘다고는 할 수 없지만 유가 급등, 수요 감소 등 갖가지 경고음이 켜지면서 예전의 자신감은 이제 ‘설마’ 하는 의구심으로 바뀌는 모습이다.
실제로 LG화학(051910)과 롯데케미칼(011170)·SK종합화학·한화케미칼(009830) 등 국내 석화 기업 ‘빅4’의 올해 1·4분기 매출은 지난해 전년 동기 대비 소폭 증가했지만 영업이익은 큰 폭으로 감소했다. 4개 기업의 1·4분기 총매출은 15조8,690억원으로 지난해(15조4,175억원)보다 늘었지만 영업이익은 1조6,894억원으로 지난해(2조994억원)보다 20% 이상 감소했다. 수익성을 나타내는 영업이익률도 13%에서 10.2%로 뚝 떨어졌다.
정유사들도 유가 급등으로 직격탄을 맞았다. 정유사의 수익성을 나타내는 정제마진은 지난해 배럴당 7~8달러 선을 넘었다 이제는 반토막 나면서 최근 손익분기점 수준까지 떨어졌다. 국내 정유사들의 1·4분기 실적도 부진했다. SK이노베이션(096770)·GS칼텍스·S-OIL·현대오일뱅크 등 정유 4개사의 영업이익은 1조5,606억원으로 지난해 동기 2조2,772억원보다 31.5%나 급감했다. 앞으로 다소 회복될 것으로 예상되지만 지난해 수준에는 미치지 못할 것으로 보인다.
실적 악화의 가장 큰 이유는 유가 급등과 환율 강세다. 1·4분기 두바이유는 배럴당 67달러 선을 돌파했으며 환율은 달러당 1,060원대가 붕괴된 적도 있다. 유가 상승은 계속돼 최근에는 70달러를 넘어서기도 했다. 가장 우려했던 외부변수가 국내 기업의 발목을 잡은 셈이다. 여기에 정유사들은 제품 가격이 원유 상승세를 쫓아가지 못해 마진이 크게 악화됐다. 실제로 올해 5월까지 국내에 도입된 원유는 배럴당 66.85달러로 지난해 같은 기간 도입된 원유에 비해 25% 상승했지만 수출된 휘발유의 평균가격은 79.19달러로 지난해보다 19.5% 상승하는 데 그쳤다.
공급 증가에 대한 우려도 엄습했다. 중국의 센후아닝메이는 올 초 연산 45만톤 규모의 고밀도폴리에틸렌(HDPE)과 선형저밀도폴리에틸렌(LLDPE) 설비를 가동했으며 CSPC도 연산 30만톤 규모의 LLDPE와 40만톤의 HDPE 설비를 가동하기 시작했다. 여기에 값싼 셰일가스를 원료로 한 미국산 폴리에틸렌(PE) 제품이 동아시아 역내시장에 유입되면서 PE 가격과 마진 하락으로 이어졌다. 업계 관계자는 “기초 유분의 경우 유가가 급등하면서 원재료 가격은 상승했지만 제품 가격은 약세가 이어졌다”며 “에틸렌·프로필렌 등을 주로 생산하는 기업에 악영향을 미쳤다”고 말했다.
악재가 이어지는 가운데서도 글로벌 수요가 꾸준히 증가하면서 더 이상의 상황 악화를 막아냈다는 점은 다행스럽다. KDB산업은행에 따르면 올 상반기 석유화학제품 수출은 중국 환경규제에 따른 동아시아 내 수요 증가로 전년 동기 대비 4.2% 증가했고 이 때문에 국내 화학제품 생산도 1.3% 증가했다. 정유 업계에서도 휘발유를 대신해 경유가 수요 증가와 가격 상승으로 효자 노릇을 했다. 업계의 한 관계자는 “정유·화학도 수요가 좋다고 만족하기에는 불안한 상황이 계속되고 있다”며 “해법은 이미 나와 있고 기업들도 대비하고 있지만 대규모 자본이 투입돼야 하는 만큼 더딘 것도 사실”이라고 말했다.
/박성호기자 junpark@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