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 칼럼] 중국식 트럼프 사용 설명서

홍병문 베이징특파원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의 오른팔인 왕치산이 올 초 전국인민대표대회에서 국가 부주석으로 복귀할 때만 해도 그가 대미 무역협상 전면에 나설 것이라는 예상을 의심하는 이는 적었다.

시진핑의 복심으로 불리는 실세인데다 과거 금융위기 시절에 보여준 탁월한 위기관리 능력과 미국 인사들과의 친분, 경제 분야의 경력 등을 고려하면 당연한 분위기였다. 시진핑 경제 책사인 류허 부총리가 그를 보좌해 대미 무역협상 선봉에 나설 경우 무역 갈등 해결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도 컸다.

하지만 이 같은 낙관론은 아직 현실화하지 않는 분위기다. 부주석 등극 이후 5개월이 지난 지금 미국과 중국은 두 폭주 기관차의 정면충돌을 예고하는 극한 대결로 치닫고 있다. 외신은 물론 중국 매체에서 수개월 동안 그의 존재감은 좀처럼 찾기 힘들었다. 왕치산이 두문불출하고 있다는 구설까지 나돌자 인민일보는 12일 왕 부주석이 베이징에서 람 이매뉴얼 시카고 시장과 만나 중미관계와 양국 지방 협력에 대해 의견을 나눴다는 소식을 서둘러 전했다. 왕치산의 역할이 부각하지 않는 것을 두고 일부 중화권 매체들은 큰 형님의 실종사건에 비유하며 화제로 삼고 있을 정도다.

왕치산이 예상과 달리 아직 미중 무역협상의 전면에 나서지 않는 이유를 두고 해석도 분분하다. 무엇보다 현재 미중 무역협상 자체에 대한 중국 지도부의 부정적인 시각이 크다는 것을 반영한다는 분석이 많다.


미국의 대중국 협상 전략과 전방위 압박의 진의가 어디에 있는지 중국은 혼란스러워하고 있다. 미국 무역 협상팀은 물론 트럼프 핵심 참모진은 자유무역을 선호하는 온건파와 보호무역을 내세우는 강경파로 갈라져 있고 한반도와 중국·태평양 안보 이슈에서도 강온파가 뒤섞여 혼재된 목소리를 내는 점에 중국은 당혹스러워하고 있다.

중앙기율검사위원회 서기를 맡아 반부패 사정 작업을 주도하며 시 주석의 복심으로 불리는 왕 부주석이 미국의 속뜻이 불분명한 이번 무역전쟁의 협상 수장으로 나서 어정쩡한 결과를 내거나 큰 상처를 받을 경우 시진핑의 권위와 리더십은 큰 타격을 입을 수밖에 없다. 시 주석과 일심동체인 그의 정치적 위상을 고려하면 이는 시 주석의 개인 실책으로 받아들여지게 된다는 위기의식이 지도부 내에 깔려 있다.

류 부총리의 미국 방문과 함께 이뤄진 5월 미중 2차 무역협상 이후 백악관이 이를 비웃듯 폭탄 관세 부과 계획을 발표하자 중국 정가에서는 류 부총리가 아닌 왕 부주석이 나섰다면 시진핑 지도부가 엄청난 체면 손상을 입었을 것이라는 자조 섞인 목소리가 나오기도 했다.

이후 중국 지도부는 트럼프 행정부에 보다 신중한 행보를 보이고 있다. 언론 매체 등에 이른바 트럼프 사용 설명서 성격의 보도 지침도 흘렸다. 관영매체에 내린 구두 지침은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에 대한 공격적인 단어를 사용하지 말고 미국이 민감하게 반응하는 첨단산업 육성책인 ‘중국제조 2025’ 언급도 자제하라는 내용이 포함된 것으로 알려졌다. 미중 무역전쟁 보도 비중을 적당한 수준에서 조절하라는 지시도 내려졌다고 한다.

최근 중국 정가의 분위기를 보면 트럼프 행정부와 미중 무역전쟁에 대한 시진핑 지도부의 접근법은 보다 신중하고 장기적인 관점을 바탕으로 한 대응으로 모인다. 상대의 선제공격 수준을 넘어서는 과도한 맞대응은 피하고 북핵 문제와 같은 트럼프의 특별 관심사항에 대한 이슈 제기를 통해 주의를 적절히 분산시킨다. 정치 논리에 민감한 상대의 속성에 맞춰 오는 11월 미국 중간선거까지는 트럼프 지지 기반의 동향을 면밀하게 분석해 공략한다. 시진핑의 ‘트럼프 사용 설명서’라고 표현해도 무방한 중국식 무역전쟁 대응 지침서의 핵심은 ‘상대는 장기적으로 세계 최강대국 도약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맞상대해야 하는 최후의 경쟁자’라는 인식으로 요약된다. 외형적으로는 무역역조 등 경제 문제에서 파생된 이번 갈등의 근원에는 결국 두 스트롱맨의 패권 대결이라는 정치 논리가 깔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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