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텍사스주 베이타운의 한 파이프 제조공장에 원료인 대형 철강 롤들이 쌓여 있다./연합뉴스
“현 상태를 유지하는 것은 어렵지 않겠지만 철강만으로는 더는 성장할 수 없습니다.”
지난 4월 창립 50주년 기자간담회에서 권오준 포스코 회장이 이같이 말했다. 4년간의 구조조정을 통해 지난해 매출 60조원, 영업이익도 6년 만에 최대인 4조6,000억원을 달성하면서 시장의 기대가 컸지만 권 회장은 조심스러웠다.
권 회장이 철강 업계의 성장판이 닫히고 있다고 진단한 배경에는 글로벌 공급 과잉이 자리 잡고 있다. 철강협회에 따르면 지난해 전 세계 조강(쇳물) 생산능력은 22억7,000만톤에 달한다. 하지만 조강 수요는 17억2,000만톤에 그친다. 전 세계 철강사가 생산능력을 30% 감축해야 수요와 공급이 균형을 이룬다는 말이다.
글로벌 공급 과잉 문제의 중심에는 중국이 있다.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조선·건설 등 철강을 다량 요구하는 산업이 불황을 겪는 와중에도 중국은 설비 증설에 나서 2008년 6억톤 수준이던 생산능력을 11억톤까지 끌어올렸다. 생산능력이 수요를 웃돌자 사달이 났다. 과잉 상태의 설비를 돌리다 보니 중국산 철강재가 저가로 전 세계에 퍼져 글로벌 철강 가격을 낮춘 것이다. 철강 업계 관계자는 “중국의 철강 기업은 대부분이 국영기업이다. 자국 근로자의 일자리가 달려 있는 만큼 적자를 보더라도 공장을 일단 돌리고 본다”고 설명했다. 최근 중국이 자국 제조업 위축 등으로 구조조정에 나서고는 있지만 공급 과잉 문제가 쉽게 해결되지는 않을 것으로 전망되는 이유다.
국내 철강 수요는 수년째 답보 상태다. 국내 강재 소비량은 5,640만톤으로 2015년 5,580만톤, 2016년 5,710만톤에 이어 5,500만톤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자동차·조선 등 주요 수요 산업은 지난해에 이어 부진이 지속되는 가운데 건설경기에도 적색등이 켜졌다. 주택경기 하락에 따른 수주 감소에다 정부의 사회간접자본(SOC) 예산이 지난해보다 14% 감소한 19조원에 그치는 등 공공투자 축소 기조까지 관측된다. 수요는 정체됐는데 중국산 저가 철강재 유입 리스크는 여전하니 국내 판매를 통한 성장을 기대하기 어렵다는 얘기다.
중국산 물량이 한국뿐 아니라 전 세계 시장을 잠식하면서 해외에서 탈출구를 찾기도 쉽지 않다. 중국의 물량공세에 자국 산업이 고사 위기에 처하자 각국이 무역장벽을 쌓아올리면서 상황은 더욱 나빠지고 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행정부가 무역확장법 232조를 발동한 게 대표적이다. 수입산 철강재를 막기 위해 사문화된 법까지 동원해 보복관세를 매기기 시작한 것이다.
미국발 보호무역주의는 전 세계에 도미노처럼 확산하고 있다. 유럽연합(EU)은 최근 미국의 관세 부과로 인한 자국 업계의 피해를 막기 위해 외국산 철강 수입에 대한 세이프가드(긴급수입제한조치) 발동 수순에 들어갔다. 313만톤(약 3조원) 규모의 수출시장도 문제지만 향후 더 많은 나라가 무역전쟁에 동참할 수 있다는 점이 더 큰 골칫거리다. 중국·일본 다음으로 많은 철강을 생산하는 인도 등이 자국 철강 산업을 보호하기 위해 빗장을 걸어잠글 가능성이 제기된다.
국내외 시장에서 활로를 찾기 어려운 한국 철강에 남은 선택지는 고부가가치화 정도다. 하지만 중국이 또다시 발목을 잡으려 하고 있다. 시진핑 정부는 “세계 철강 시장을 장악하겠다”는 목표를 내걸고 자국의 대형 철강 업체들을 합병시키며 ‘몸집 불리기’에 나서고 있다. ‘보산강철’과 ‘무한강철’ 두 대형 철강사를 통합해 세계 2위 철강 업체 ‘보무강철’을 탄생시킨 중국은 오는 2025년까지 자국 내 대형 철강사들을 8,000만톤급 3~4곳, 4,000만톤급 5~8곳으로 통폐합할 예정이다. ‘규모의 경제’를 실현할 수 있게 된 신생 대형 철강 업체들은 자동차 강판 등 고급 철강재 생산에 본격적으로 나설 것으로 보인다.
철강 업계 관계자는 “중국 철강사는 예외 없이 국영기업이라 투자가 확실히 뒷받침된다”며 “지금은 유럽(아르셀로미탈)·일본(신일본제철)·한국(포스코)이 기술력에서 앞서 있다고 할 수 있지만 구조조정이 일단락된 뒤 중국 정부가 연구개발(R&D) 지원을 강화하면 격차가 생각보다 급격히 줄어들 것”이라고 내다봤다.
/김우보기자 ubo@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