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당은 지금보다 늘어야 합니다. 그렇지만 배당이 과도하면 주가를 떨어뜨릴 수 있습니다.” (국내 대형 기관투자가)
국민연금이 스튜어드십 코드(기관투자가의 수탁자책임) 도입을 계기로 배당확대를 요구하는 데 대해 시장은 엇갈린 목소리를 낸다. 주주권 행사 차원에서 배당 요구는 배당에 인색한 국내 기업들에 자극이 될 것으로 보는 시각이 있는 반면 장기펀드인 국민연금의 배당확대 요구가 자칫 기업경영에 부담을 줄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실제로 주주 가치를 최우선으로 여기는 미국에서조차 최근 공적연금은 공개 압박을 줄이고 있으며 민간 펀드의 과도한 배당확대가 기업의 투자재원을 갉아먹는다는 비판이 나오고 있기 때문이다.
보건복지부는 17일 스튜어드십 코드 도입 공청회에서 공개할 초안에 국민연금의 배당 요구를 강화하기 위해 배당금이 낮은 기업은 유예기간 없이 중점관리 대상으로 올리고 관리 대상 기업을 기존 3~4개에서 7~8개로 늘리기로 했다. 국민연금은 그동안 유예기간을 둬 블랙리스트 정책을 도입한 지 3년 만인 지난 5월에야 남양유업(003920)과 현대그린푸드(005440)를 공개중점관리기업으로 공개했다.
일단 국민연금의 이 같은 조치는 국내 상장기업의 지나치게 낮은 배당 때문이다. 시장조사기관인 톰슨로이터의 집계에 따르면 지난해 국내 상장사의 배당성향은 18.3%로 영국(65.4%), 독일(40.8%), 미국(38.9%) 등 주요 선진국은 물론 대만(57.2%), 인도네시아(41.7%), 브라질(38.4%), 중국(32.3%) 등 신흥국보다 떨어진다. 낮은 배당은 국내 주식시장 시가총액의 7%인 131조5,000억원을 들고 있는 국민연금의 수익에 직접적인 악영향을 미친다. 한 전직 기금운용본부장은 “과거에는 국민연금이 배당확대를 요구하지 않아도 국내 기업의 성장세가 커서 주가차익을 누릴 수 있지만 고도성장기가 지난 지금은 국내 상장사도 최소한 글로벌 평균 수준의 배당확대가 필요한 시점”이라고 지적했다. 주주권 행사로 배당확대의 정당성은 분명히 있는 셈이다.
문제는 국민연금의 배당확대 전략이 행동주의 헤지펀드와 유사해지고 있다는 데 있다. 국민연금은 장기투자자로서 강한 압박으로 단기간 배당금과 주가 상승을 꾀하는 헤지펀드와 목표가 다르다. 송홍선 자본시장연구위원은 “해외의 공적연금, 사적연금, 행동주의 헤지펀드 등이 주주권을 강화한 결과 1년 이내 단기차익을 누리는 데는 효과가 있었지만 장기수익으로 이어진다는 증거는 찾지 못했다”며 “특히 주주권 행사 방법 가운데 캠페인이나 위임장 대결 등 기업에 적대적인 방법을 취할수록 장기수익률에는 역효과를 내고 있다”고 말했다. 강력한 배당확대 요구가 자칫 단기차익을 노리는 헤지펀드들과 마찬가지로 단기수익에만 도움을 준다면 100년 이상의 수익구조를 가져야 하는 국민연금의 전략으로는 적합하지 않다는 지적인 셈이다. 앞서 국민연금 스튜어드십 코드를 검토한 의결권행사전문위원회는 국민연금은 장기투자자로서 단기투자자와 다르다는 선언적 문구를 넣자고 건의했지만 복지부는 받아들이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미국에서는 애플이 행동주의 펀드인 ‘아이칸’의 요구에 따라 2,000억달러 규모로 자사주를 매각하면서 투자 여력이 떨어지고 기업의 혁신능력이 떨어졌다는 우려가 나오고 있다. GM·AT&T·휴렛팩커드 등도 본업보다는 인수합병(M&A)이나 금융 및 마케팅 전문가를 최고경영자(CEO)로 영입한 후 본업 투자를 줄이고 비용 절감만 추진하면서 본업보다 단기간 이자놀이에 치중하는 ‘기업의 금융화’가 대세가 돼버렸다.
대표적인 미국의 공적 연기금인 캘퍼스는 국민연금에 앞서 배당확대를 위해 공개적인 블랙리스트를 작성했지만 몇 년 전부터 비공개로 바꿨다. 기업과 주주가 적대적인 관계에서는 오히려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고 기업 평판만 망가뜨린다는 판단 때문이다. 한 의결권행사 전문위원은 “일본의 공적 연기금은 투자기업의 강점을 공개하면서 기업 가치를 높이는 선순환을 이루고 있다”면서 “최근 국민연금의 주주권 확대가 악순환에 빠질까 걱정된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배당확대와 같은 주주권 행사에 앞서 교과서적이지만 기금의 독립성과 책임성이 분명해져야 한다고 강조한다. 전광우 전 국민연금 이사장은 “국민연금의 주주권 행사는 과거 정부에서도 제기됐던 문제지만 미뤄졌던 가장 큰 이유는 의사결정의 독립성을 담보할 기금체제 개혁이 미진했기 때문”이라며 “국민연금의 투자와 의결권 관련 사항은 기금운용 원칙에 따라 국민연금의 자율적 판단으로 결정된다는 점을 분명히 해야 주주권 행사를 정당화할 수 있고 시장 왜곡이나 주주 소송 등 역풍도 막을 수 있다”고 강조했다.
/임세원기자 why@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