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록이 예술이다…'호모 아키비스트;작가의 개입'展, 31일까지 도잉아트서

한국·싱가포르 예술가 19명 참가
디지털정보를 예술로 승화 시키는
작가들의 작업 과정·경험담 공유

김지민 ‘원웨이(The One Way)’ /사진제공=도잉아트

예술가의 작품은 어떻게 탄생할까. 섬광처럼 떠오른 영감으로 단숨에 그려내는 ‘화가의 신화’는 옛말이다. 일필휘지의 문인화나 폭발하는 표현주의의 시대도 지났다. 우리 시대 현대미술가에게 작품이란 오랜 고민이 곰삭은 결과이며 떠오른 감정과 생각을 차곡차곡 기록하거나 아카이브(archive)처럼 보관했다가 자신만의 시각언어로 변환시켜 내보내는 경우가 많기에 그 과정이 사뭇 복잡하다. 서초구 도잉아트에서 한창인 ‘호모 아키비스트;작가의 개입’은 그렇게 탄생하는 작품의 뒷얘기를 보여주는 전시다.

사진작가 김도균(KDK)의 독일 유학 초기인 2003년 무렵의 작품들. 각각의 작품을 포장했던 박스를 재료로 한 설치작품도 왼쪽에 함께 두었다. /사진=조상인기자

일상용품과 주변 건축물 등에서 예상 못 한 장면을 발견하는 사진작가 김도균(KDK). 현대사진학을 배우기 위해 독일로 가 베어학파의 토마스 루프를 사사한 그는 유학 초기에 아우토반 풍경을 즐겨 찍었다. 빠르게 달리는 자동차는 차체를 지운 채 추상적인 색으로 속도감을 남기고 시간의 층을 쌓았다. 당시의 추상화(化) 시도가 지금 작품의 근간이 됐다. 설치작가 권오상은 육중한 덩어리로서의 전통 조각에 반발해 가벼운 스티로폼 위에 다양한 각도에서 찍은 수십, 수백 장의 사진들을 붙여 작품을 만든다. 평면의 사진을 입체로 만드는 ‘사진조각’을 창안한 그에게 사진은 재료이자 작업 과정이다. 이번 전시에는 지난 2016년 호주 시드니 에르메스 매장 윈도프로젝트에 선보인 작품을 내놓았다.


권오상 ‘버스트(황새)’ /사진제공=도잉아트

회화작품을 프린트로 선보인 홍경택(왼쪽부터)과 소리를 시각작품으로 변환하는 이준, 작품의 토대가 된 드로잉을 디지털프린트 한 최수앙 등의 작품이 전시 중인 ‘호모 아키비스트’ 전경. /사진=조상인기자

홍콩 크리스티 경매에서 2007년 7억7,000만원에 이어 2013년 9억7,000만원에 팔리며 당시 경매에서 한국미술품 최고가 기록을 썼던 홍경택의 ‘연필1’. 작가가 택한 소재는 작업실에 있던 각양각색의 연필들이었다. 편집증적으로 꽂힌 필기구에 화가는 현대 소비사회를 풍자하는 듯한 강렬한 색감을 얹었다. 그림 속에는 고급문화와 대중문화, 절제와 표현, 성속(聖俗)이 혼재한다. 작가는 이번 전시에서 처음으로 특수유리 마스터픽스에 프린트한 작품을 선보였다. 제품 라벨을 소재로 작업했던 설치작가 김지민이 출품한 ‘원웨이(The One Way)’는 평균대 위에 줄지어 선 15인의 군상이다. 각 인물의 얼굴은 라벨 등 ‘소비문화 기호’로 채워져 있고 몸짓은 무기력하다. 자본주의를 교묘하게 풍자했다.

유릭 라우 ‘세 개의 돔’ /사진제공=도잉아트

기획자인 독립 큐레이터 이승아 씨는 “판화 개념을 확장하고 새로운 전망을 제시하고자 한다”고 전시 의도를 소개했다. 지난 2014년 토탈미술관에서 열린 ‘써드 프린드(The Third Print)’전이 시작이었다. 원작과 판화가 있다면, 판화에 화가의 붓질을 더해 ‘제3의 작품’을 탄생시킨다는 뜻. 대중성과 저변확대에 유리한 판화의 미래를 보여준 전시로 호평받았다. 그 후속 격인 이 전시에는 싱가포르의 유릭 라우가 작가 겸 기획자로 함께했고 한국작가 13명과 싱가포르작가 6명이 참여했다. 이승아 큐레이터는 “아카이빙을 주제로 예술가들이 방대한 디지털 시대의 정보를 어떻게 자기화해 재현하는지에 주목했다”고 말했다. 해외에 거주하며 자신의 정체성 탐구를 작품에 반영하는 최원정 작가는 자신의 DNA역사를 더듬은 과정을 철판 위에 새긴 세계지도로 표현했다.

웨이신 총 ‘부드러운 폭포’ /사진제공=도잉아트

작가 유릭 라우가 3면 제단화 형식으로 꾸민 대형 미술관의 이미지, 웨이신 총이 내놓은 견고한 대리석 문양을 가진 부드러운 커튼 등의 작품은 모두 그들의 영상작품에 등장하는 소재이자 주제의 단면이다. 림 셍겐은 자신이 개발한 앱으로 전시장 내 QR코드를 스캔하면 자화상을 볼 수 있는 ‘첨단 기술’ 작품을 선보였다. 판화의 진화는 과학과의 접목이 불가피하다는 의미다. 작가 이준은 비디오와 설치·게임 등 다양한 미디어를 넘나들며 빅데이터를 시각물로 만든다. 미술대학을 다니다 공학 전공으로 돌아선 독특한 이력의 그는 소리를 담은 음반이 아니라 소리를 시각화한 하나뿐인 ‘그림음반’을 전시장에서 보여준다. 31일까지.
/조상인기자 ccsi@sedaily.com

이준 ‘ZPK204’. 소리에 따라 작품 속 작은 구슬이 움직이고 그 소리는 음반이 아닌 시각작품으로 만들어진다. /사진제공=도잉아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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