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명국 ‘달마도’. 17세기에 제작된 수묵화로 83x57cm 크기 종이에 달마대사를 담고 있다. /사진제공=국립중앙박물관
뭣이 두려워 망설이는가. 거침없이 달려본 게 언제인가. 여기 도(道) 깨친 달마가 당신에게 묻는다. 부리부리한 눈과 털 긴 눈썹을 팔(八)자로 일그러뜨리며. 미간에도 날카로운 주름이 파였다. 주먹같이 큼직한 매부리코와 짙은 콧수염, 수북한 구레나룻이 이국적이지만 심심한 담묵으로 그려 친근하다. 달마는 본래 남인도 향지국의 왕자로 태어났다. 승려가 된 달마는 동쪽으로, 남북조시대의 중국으로 가 선종(禪宗)을 퍼뜨렸다. 달마는 양무제(464~549)를 만나 이기적인 공덕 쌓기를 매섭게 비판하고는 소림사에서 9년간 면벽(面壁) 수행했다. 그런 달마가 어찌 여기 있는가. 화가 김명국(1600~1663년 이후)이 붓끝으로 불러냈다. 먹 묻히기 무섭게 단숨에 그리는 신필(神筆)을 휘둘렀다. 그저 선 몇 개 툭툭 찍어낸 자리에서 달마가 눈을 부라린다. 짙은 콧수염을 지나 빽빽한 턱수염과 구레나룻에 다다랐을 때 화가의 손짓은 빗질하듯 짧게 반복적으로 움직였다. 클라이막스 돌입 직전의 트레몰로처럼.
김명국 ‘노엽달마(蘆葉達磨)’. 갈댓잎을 타고 강을 건너는 달마를 그리고 있다. /사진제공=국립중앙박물관
실수가 겁나는가, 그림이 또 묻는다. 얼굴을 완성한 화가는 허리 한번 쭉 펴고는 종전과 달리 진한 먹을 푹 찍어 옷깃을 그리기 시작한다. 호기로운 붓은 어느 한 곳에서도 머뭇거림이 없다. 누르기 무섭게 벼락같이 꺾는다. 손의 움직임이 어찌나 기발한지 눈은 따라 뒤쫓기도 벅차다. 쿡 찍어 내리훑은 먹선의 기세가 꼭 절벽 같다. 굵고 짙은 선(線)이 합장한 두 손을 감싸 달마의 강단 있는 성품을 드러낸다. 두툼한 어깨를 두른 가늘고 날렵한 선에는 피안의 진리를 깨닫고자 애쓴 정신세계가 오롯하다. 더할 것도 없고 뺄 것도 없는 그림이다.
여기에 얼굴과 몸통을 연결하는 목주름 세 개가 기막히다. 면벽구년(九年) 묵언수행의 긴 시간동안 스스로를 들여다보느라, 지혜를 구하는 사람들에게 예 갖춰 고개 숙이느라, 무엇보다도 낮은 곳의 작은 존재들까지 엎드려 돌아보느라 생긴 주름이리라. ‘필단의연(筆斷意連)’. 필획은 끊어져도 뜻은 이어진다. 미술사학자인 고(故) 오주석은 저서 ‘옛 그림 읽기의 즐거움’(솔 펴냄)에서 ‘달마도’의 선을 그렇게 표현했다. 그 ‘뜻’이 무엇이겠나. 글로 적을 수도 말로 다할 수도 없는 게 진리다. 그린다고 다 그려질 리 만무한 게 달마의 참된 모습이니, 그게 진리다. 깨달음은 끊기고 비어있는 그 틈(空)을 관통한다. 먹이지, 옷인가. 선이지, 사람인가. 그림이 되묻는다. 당신이 보고 있는 게 달마요, 아니면 당신 자신이요.
김명국 ‘니금산수첩’ 내 ‘사시팔경도’ 중 초여름을 그린 장면. /사진제공=국립중앙박물관
국립중앙박물관이 소장한 이 ‘달마도’는 김명국의 대표작이다. 일제강점기이던 지난 1942년에 모리모토(森本)라는 성을 가진 일본인이 기증했다고 장부에 기록돼 있다.
1600년 무렵 태어난 김명국은 정확한 생몰연도는 고사하고 고향이 어딘지 어떤 집안에서 나고 자라 어떻게 화원이 됐는지 전혀 확인되지 않는다. 천출이었다고들 한다. 오직 타고난 재주 하나로 도화서에 들어갔다. 화원 추천과 선발 업무의 종 6품 교수(敎授)라는 나름 중책도 맡았고 정6품에까지 올랐다. 왕실 의궤에는 그의 이름이 세 가지(明國,命國,鳴國)로 적혀 있는데 화가가 이름을 바꿔가며 쓴 것인지, 사가(史家)에게 화원의 이름 같은 것은 그다지 중요치 않은 것인지 모를 일이다. 하나 김명국 자신은 이름을 뭐라 적든 그림만 제대로면 그걸로 충분하다 껄껄대지 않았을까. ‘달마도’ 왼쪽에 적힌 ‘연담(蓮潭)’이 그의 호다. 더러운 진흙밭에 살지언정 그림으로 연꽃같은 아름다움을 피우고자 했다. 천재화가 연담의 실력을 달마도 하나로 가늠한다면 곤란하다. 도화서 화원은 산수화·인물화·화조화·사군자 등 모든 그림에 능통해야 하고 생생한 묘사력은 필수였다. 한 번은 인조(재위 1623~1649)가 공주의 머리빗을 보내 그림을 그리라 명했다. 열흘 뒤 빗을 가져왔으나 그려놓은 게 없어 이상했다. 다음 날 머리 매만지던 공주가 빗 가장자리에 이 두 마리가 있어 손톱으로 눌러 죽이려 했다. 다시 보니 그림이었다. 그의 묘사는 작을수록 더 섬세하고 치밀했다.
김명국은 일본을 사로잡은 한류(韓流)스타의 원조였다. 그는 조선통신사 수행화원 자격으로 1936년과 1643년에 일본을 다녀왔다. 공식 화원의 임무는 외교 내용과 현지 풍물을 그림으로 남기는 것이지만 민간외교 차원에서 현지인들에게 그림을 그려주기도 했다. 당시 일본에서는 정신적 체험을 중시하는 선종이 유행이었다. 하지만 그들의 선종화는 세세한 소묘풍이라 깨달음의 본질에 닿기에는 뭔가 부족했다. 그 갈증을 김명국이 채웠다. 몇 번의 붓질로 세상을 뒤흔들 듯한 그림에서 수행 끝 깨달음의 순간을 경험하는 듯했다. 일본이 열광했다. 통신사가 머무는 숙소 앞에는 그림을 청하는 일본인들의 긴 줄이 늘어섰다. 일필휘지로 그리는 수묵화라지만 너무 힘들었다. “왜인들이 밤낮으로 모여들어 괴로움을 견디지 못한 김명국은 심지어 울려고까지 했다.” 통신사 김세렴이 1636년11월14일자 일기에 이같이 적었다. 김명국이 일본에 다녀온 게 제4차 통신사행이었는데 그때부터 조선에서 통신사 일행이 도착하면 현지인들이 앞다퉈 조선의 그림과 글씨를 얻으려는 풍조가 두드러졌다. 두 번째 통신사행은 일본측에서 “연담 같은 사람이 오기를 바란다”고 요청했다. 총 12번의 조선통신사 역사에서 공식 화원으로 두 차례 파견된 이는 김명국이 유일했다.
김명국 ‘산수도’. 도석인물화 못지않게 산수화에도 뛰어났던 작가의 기량을 보여주는 대표작이다. /사진제공=국립중앙박물관
유명한 일화가 하나 더 있다. 일본 체류 중 지방 권력자인 장군의 초청을 받았다. 세 칸 짜리 건물을 새로 장만하고 고급 비단을 발라 준비한 그는 김명국에게 장병화(障屛畵)를 부탁했다. 장병화란 어두운 실내를 밝게 하기 위해 금박이나 은박, 금이나 은을 섞은 진흙으로 물감을 만들어 벽화처럼 문과 병풍 등에 그리는 그림이다. 칸막이로 공간을 나누는 일본 건축의 특수성 때문에, 특히 16~17세기에 성행했다. 물론 귀한 그림에 대한 보답도 두둑하게 준비해 둔 터였다. 당연히 술도 함께. 연담의 또 다른 호는 ‘취옹(醉翁)’이다. 술 좋아하는 조선 화가로 김명국·장승업·최북이 꼽힌다. 김명국에 대한 기록이 거의 없음에도 불구하고 ‘청죽화사’나 정래교의 ‘완암집’, 남유용의 ‘뇌연집’ 등에는 그가 술을 좋아했다는 점이 따라붙었다. 술 한 잔 마셔야, 아니 말술(斗酒)은 걸쳐야 그림에 시동이 걸렸다. 잔뜩 취기 오른 김명국이 붓을 집어들었다. 금가루 탄 물이 냉큼 앞에 놓였다. 그런데 취옹이 금물을 술처럼 들이키더니 사방 벽에 내뱉는 게 아닌가. 화난 장군이 칼을 빼 들었다. 그제야 김명국은 호탕하게 웃으며 다시 붓을 쥐더니 벽에 묻은 금물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힘찬 선이 물길 되어 흐르고 조이듯 뽑아낸 선이 산세를 이뤘다. 먹 튄 자리에서 절벽이 치솟고 바위가 웅크리더니 나뭇잎이 흔들렸다. 붓질은 얌전하게 종종걸음 치다가도 돌연 거칠게 내달리고 뒹굴었다. 황홀한 산수도가 방을 감쌌다. 술에 취한 것인지 그림에 취한 것인지 화가의 그림인지 조물주의 자연인지 몽롱할 지경이었다. 술과 칼이 교차하는 그 왜인의 방에서 연담은 평생의 득의작(得意作)을 이뤄냈다. 이후 장군의 집은 명소가 됐고 그 후손은 입장료를 받고 그림을 보여주기도 했다는데 아쉽게도 지금은 작품의 행방을 알 수 없다.
이처럼 김명국의 역작들은 대체로 일본에서 그려졌다. 달마도를 비롯한 그림들이 돌아온 것은 천우신조다. 영남 지방의 한 큰스님에게서 ‘지옥도’를 요청받아 선금 격인 비단으로 진탕 술만 마시고는 그림 달라는 스님에게 민머리 승복차림의 사람들이 지옥에서 고초 겪는 장면을 내놓은 일화도 전한다. 화들짝 놀란 스님은 벌벌 떨며 그림은 됐으니 비단이라도 돌려달라 했다. 연담은 또 껄껄거리며 지옥에 떨어진 사람들의 머리털과 수염을 그려넣고 색색의 옷을 입혀줬다. 비록 자신의 신분은 미천했고, 생계 때문에 그림을 팔아야 했지만 부자와 권력자에 대한 날 선 비판과 풍자를 굽히지 않은 연담이다. 달마가 양무제에게 맞섰듯.
김명국 ‘은사도’ /사진제공=국립중앙박물관
일명 ‘은사도(隱士圖)’라 불리는 말기작에는 그런 연담과 달마가 공존한다. 유홍준 전 문화재청장이 저서 ‘화인열전’에 소개했고 연세대 철학과 이광호 교수가 화제를 분석했다. ‘없는 데서 있는 것을 만드는데/ 그림으로 그리면 되었지 무슨 말을 덧붙이겠는가/ 세상엔 시인이 많고 많지만/ 이미 흩어진 넋을 누가 불러줄 것인가.’ 독살 의도를 알고도 태연히 음식을 받아먹고 열반에 든 달마는 환생해 갈대를 타고 서쪽으로 갔다. 두건 쓰고 대지팡이 짚은 은일자의 뒷모습에서 달마를 동경하며 자신의 죽음을 예감한 연담이 보인다. 처연하다. 그런 김명국을 남태응은 “그림의 귀신”이라고 했고 “김명국 앞에도 없고 김명국 뒤에도 없고 오직 김명국 한 사람만 있을 따름”이라고 극찬했다.
그림이건 글이건 생각을 풀어내는 일이다. 충분히 고민하고 검토했다면 이제 움직일 때다. 주저 말고 달릴 때다. 가자.
/조상인기자 ccsi@sedaily.com
김명국 ‘산수인물도’. 걸어가는 나귀와 그 등에 탄 인물 모두 술 취한 듯 비틀거리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사진제공=국립중앙박물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