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모리츠의 상징인 산양 동상 뒤로 언덕 위에 자리한 도르프 마을이 보인다
스위스의 명물인 빙하특급열차를 탄 뒤 생모리츠 역에 잘 내렸고 호텔에 여유롭게 도착해야 할 시간인데 난 여전히 택시 안에 있다. 분명히 역에서 택시 기사가 내게 ‘호텔 발트하우스(Hotel Waldhaus)에 가냐“고 묻기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고 호텔 셔틀 대신 자신이 태우러 왔다고 해서 탔을 뿐인데 택시는 이미 10분여를 달리고 있다. 걸어서도 10분이면 도착할 거리인데 차를 타고 10분이나 가다니…
뭔가 이상한 낌새를 느낀 뒤 내가 ”호텔 발트하우스 암 제에(Am See)로 가는 것 맞냐“고 묻자 택시 기사가 화들짝 놀라며 ”노(No)“를 외친다. 택시 기사는 ”이곳 생모리츠엔 발트하우스란 명칭의 호텔이 2곳이 있다며 ’암 제에‘는 다른 호텔“이라며 차를 돌린다. 나 역시 갑자기 초조해진다. 이미 호텔에 알려준 도착 시간이 지난 탓에 역에서 날 기다리던 셔틀버스가 가버리지나 않았을까. 택시 기사 역시 본인 영업에 상당한 지장을 받은 듯 불편한 목소리로 여기저기 통화를 한다.
택시는 왔던 길을 다시 돌아 기차역 입구에 들어섰다. 택시 운전사는 갑자기 창문을 내리며 기차역을 빠져나가려는 밴 운전사에게 큰소리로 ”스톱“을 외쳤다. 그러더니 내게 ”저 차가 바로 니가 탈 셔틀“이라고 말을 한다. 셔틀은 기차역에서 날 만나지 못 하자 되돌아가려다 택시 운전사가 제지하면서 멈춰 선 것이다. 셔틀 운전사 역시 바쁜 데 시간을 상당히 지체했다는 듯 불쾌한 표정으로 내 짐을 차에 실었고 택시 기사는 여기저기 전화를 하며 시야에서 사라졌다. 택시가 1~2분만 늦었어도 셔틀을 못 탈 뻔 했는데 그나마 운이 좋았다고 해야 하나
셔틀은 역 뒤편을 돌아 언덕을 올라가더니 순식간에 호텔에 도착했다. 걸어서 10분도 채 안 걸릴 거리였다. 언덕 경사가 높은데다 눈이 쌓여 있어 캐리어와 유모차를 끌고 오르내리기엔 난코스였지만 셔틀 덕에 편하게 도착했다고 할 수 있다. 저녁을 가볍게 해결하고나니 시간은 아직 저녁 7시 밖에 되지 않았다.
생모리츠는 인근 다보스에 비해 국내에는 덜 알려진 이름이다. 다보스는 세계경제포럼으로 워낙 유명하니까. 생모리츠란 이름이 그래도 입에 붙는 건 동계올림픽 때문이다. 대한민국이란 명칭으로 첫 출전한 동계올림픽이 1948년 생모리츠 대회다. 스피드스케이팅에서 3명의 선수가 출전한 걸로 기록돼 있다. 유럽인들에게 생모리츠는 유명한 휴양도시로도 잘 알려져 있다. 이곳엔 로이커바트 못지 않은 온천마을 바드(Bad)도 있고 파리 샹젤리제에 버금가는 명품거리도 조성돼 있다. 주머니 가벼운 여행객이어서 명품을 살 일은 없지만 거리의 분위기나 한번 느껴볼까 해서 산책 겸 슬슬 호텔을 나섰다. 구글맵을 살펴보니 걸어서 20~30분 정도 소요되는 걸로 나온다. 호텔 위치가 외진 곳이어서 그런지 호텔을 나온지 5분이 지나지 않아 온통 암흑천지다. 긍정적으로 생각하면 한적하고 평화로운 길이지만 부정적으로 느끼면 어두컴컴하고 범죄의 표적이 될 수도 있는 외진 시골길을 체감 30분 가량 걸었더니 업타운(말 그대로 진정 윗동네)으로 가는 엘리베이터가 눈에 들어온다. 생모리츠의 중심가인 도르프(Dorf) 마을은 언덕에 자리하고 있어 호수 주변에서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가야 한다.
인적이 드물어 썰렁한 생모리츠 도르프의 명품거리
드디어 도르프에 도착, 분위기부터 다르다. 대도시 쇼핑몰에서 흔히 보이는 루체비스타가 반긴다. 거리 양 옆에는 네온빛을 밝히며 각종 명품샵들이 이름을 빛내고 있다. 하지만 미드 ’워킹데드‘의 좀비떼들이 한번 훑고 지나간 듯 사람이 거의 없다. 숍 안에 점원들도 하릴없이 진열상품을 정리하는 모습만 보인다. 비수기여서 그런가 시간이 늦어서 그건가. 너무 썰렁하다보니 아이쇼핑을 할 기분도 생기지 않는다. 동네 한 바퀴 구경하고 어두컴컴한 시골길에 유모차 바퀴자국만 남기고 호텔로 돌아갔다.
아침 7시. 호텔 조식을 먹기 위해 식당으로 오니 아침 풍경이 환상적이다. 호수 바로 옆에 자리한 덕에 여름이면 더욱 풍광이 멋졌을 것 같지만 겨울 아침의 풍경도 운치가 있다. 눈 덮인 호수와 함께 엊저녁 썰렁하기 그지 없었던 도르프의 고즈넉한 모습이 한 눈에 들어온다. 뷔페 메뉴 역시 다양했다. ’크로아상 킬러‘인 수아는 아침에 빵으로 배를 든든히 채웠고 나 역시 커피 한잔의 여유를 즐기며 만족스러운 식사를 마쳤다.
발트하우스 암 제에 호텔 레스토랑 창밖으로 보이는 호수와 도르프 마을 풍경이 멋지다.
오늘은 오전 10시 47분 기차로 스위스 여행의 종착지인 취리히로 출발할 계획이다. 생모리츠에서 취리히까지는 직행 열차가 없는 대신 매 30분 간격으로 환승 열차를 탈 수 있다. 나는 소요시간이 가장 짧은 기차를 택했다. 생모리츠에서 란트크바르트(Landquart)까지 이동한 뒤 환승해서 취리히까지 이동하는 코스다. 총 소요시간은 3시간 6분.
기차 시간까지 2시간 가량의 여유가 있으니 산책을 하기로 했다. 전날 저녁 ’워킹데드‘를 방불케했던 쇼핑몰을 지나 언덕을 더 오르면 피사의 사탑마냥 기울어진 ’교회탑(Schiefer Turn)‘이 있다는 정보를 찾았다. 이번엔 도르프로 가는 엘리베이터 대신 호수를 따라 쭉 걸어간 뒤 마을 초입으로 들어가는 보행로를 따라 가기로 했다. 호수 옆 눈길에 유모차가 털털거리며 움직였지만 로이커바트의 난코스에 비할 바가 못 된다. 마을로 올라가는 길은 이태원 끝자락에서 하얏트호텔 올라가듯 오르막길의 연속이었다. 명품거리에 어울리는 듯한 고급호텔들도 중간중간 눈에 들어왔다. 몇 번의 시행착오 끝에 드디어 교회탑에 도착했다. 가이드북에 따르면 피사의 사탑 기울기가 3.99도인데 비해 이 교회탑은 5.35도 기울어 더 휘청거리면서 꿋꿋이 버티는 중이라고 한다.
썰렁한 생모리츠라 그런지 이 교회에도 역시 인파가 없다. 교회 앞뜰엔 하얗게 쌓인 눈이 날 반기고 있다. 유모차를 번쩍 들고 계단을 올라 교회 뜰로 올라갔다. 기울어진 교회탑을 배경으로 신나게 사진을 찍고 쌓인 눈 여기저기에 사람이 왔다갔다는 흔적을 남긴 뒤 숙소로 돌아갈 채비를 했다.
이탈리아 피사의 사탑보다 1도 이상 더 기울어진 생모리츠 교회탑
이곳에서 숙소로 돌아가는 가장 빠른 길을 찾아보니 동네 주민들이 이용하는 듯한 지름길이 나왔다. 별다른 우려 없이 지름길을 향해 출발했는데 이게 고생의 시작이 될 줄이야. 생모리츠에서 가장 유명한 쿨룸호텔을 지나 샛길로 빠졌더니 눈 덮인 돌계단이 보인다. 여름철이었다면 운치 있는 오솔길 분위기였겠지만 겨울철 눈 쌓인 이 길은 걷기에 만만치 않아 보였다. 유모차를 들고 내려가려면 내려갈 수는 있지만 생각보다 거리가 꽤 되는 듯하다. 수초 간 고민에 빠졌다. 과연 지름길을 택할 것인가 아니면 왔던 길 그대로 둘러서 내려갈 것인가. 둘러서 내려갈 경우 시간이 30분 이상은 더 걸릴 것 같아서 유모차를 번쩍 들고 돌계단을 내려갔다. 한참을 내려가니 마을주민 할아버지가 반대편에서 올라오면서 말을 건넨다. 유모차를 내려놓고 할아버지의 참된 조언을 듣고자 했더니 할아버지는 ”유모차를 같이 들어주겠다“는 호의를 보이는 것 아니겠는가. 할아버지에게 폐를 끼칠 순 없지. ”괜찮아요(I’m okay)“를 숱하게 외치며 다시 눈계단을 내려왔다.
구글맵을 충실히 따라오고 있는데 맵이 심각하게 이상하다. 눈계단까지는 그렇다고 하더라도 이번엔 숲으로 난 산짐승의 생태통로로 내려가라고 나온다. 유모차가 없다면 아마 시도는 해 봤을 것 같지만 산을 탈순 없지 않은가. 생태통로 대신 우회로이지만 평탄한 눈계단을 따라 쭉 내려왔다. 그랬더니 엊저녁의 그 엘리베이터 입구가 눈에 딱 들어온다. 애초 목표한 방향보다는 우회하게 됐지만 아는 길을 만나니 비로소 안도할 수 있게 됐다.
구글맵이 지름길로 알려준 생태통로
숙소로 돌아온 뒤 무료 호텔셔틀을 타고 기차역에 도착했다. 생모리츠는 출발 지점이어서 역에 벌써 기차가 대기 중이다. 기차를 워낙 자주 타고 내렸더니 노련한 짐꾼처럼 혼자 캐리어와 유모차를 올리고 내리는 게 전혀 힘들지 않다. 자리에 앉아 기차가 출발하길 기다리고 있으니 20개월 수아가 계속 물을 찾는다. 생수를 쥐어줬더니 5킬로미터 마라톤이라도 한듯 벌컥벌컥 마셔댄다.
시간 약속 철두철미한 스위스답게 열차는 출발 시간을 정확히 지켜 떠났고 나는 란트크바라트 역에서 취리히 방면으로 가는 열차를 무리 없이 갈아탔다. 취리히행 열차는 특이하게 2등석에도 가족동반칸이 있었고 객실 문을 닫고 수아와 둘이서 편하게 열차여행을 즐길 수 있었다.
열차 객석에 앉아 스스로 양말을 벗는 20개월 수아
취리히 도착 40분 전. 거센 비가 열차 창문을 두드린다. 생모리츠에서는 날씨가 좋았는데 취리히는 비가 내리고 있었다. 당초 취리히 호수 근처에서 먹으려고 준비했던 전투식량을 가방에서 꺼냈다. 날씨가 안 좋으니 열차에서 점심을 해결하고 가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에서다. 줄을 당기면 발열팩이 작동해 밥이 되는 전투식량을 준비한 뒤 취사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 순간 열차에서 쌔근쌔근자는 수아를 쳐다보고 있는데 바지에 물이 묻어 있는 게 보이지 않는가. 바지를 만져보니 옷이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오전에 기차에서 물을 성인처럼 마시더니 소변으로 배출했고 양이 워낙 많다보니 기저귀가 채 흡수하지 못 했던 것이다. 기차 도착시간은 이제 20분 정도 남았는데 갑자기 할 일이 태산처럼 늘어났다. 이날 취리히에서 밤 9시 10분 출발하는 비행기를 타기 때문에 수아의 여분 옷은 이미 캐리어 깊숙한 곳에 넣어둔 상황. 옷을 갈아 입히려면 캐리어를 열고 짐을 한바탕 뒤져야 한다. 이곳 저곳을 뒤진 뒤 여분의 옷을 찾아냈고 젖은 옷을 황급히 벗겼다. 천만다행인 것이 객실이 개별공간처럼 분리된 가족동반석이어서 수아 옷갈아입히는 걸 객실에서도 할 수 있다는 점이다. 자다가 날벼락을 맞은 수아는 불편한지 계속 칭얼거렸고 진땀을 흘리며 옷을 무사히 갈아 입혔다.
도착까지는 어느덧 10분여 남은 상황. 그 사이 전투식량 취사는 완료돼 주인의 뱃속에 들어가길 기다리고 있었다. 서둘러 밥을 꺼낸 뒤 고추장 등 소스를 넣고 비비는 둥 마는 둥 한 뒤 폭풍흡입을 시작했다. 군대 훈련소에서 5분 만에 밥을 다 먹는 훈련을 이미 해보지 않았던가. 전투식량은 생각보다 아주 맛이 좋아서 금세 뱃속으로 사라졌다. 뒷정리까지 완벽하게 했더니 열차는 이미 취리히 도심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강동효기자 kdhyo@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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