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스러울 만큼 스스로를 괴롭히며 벽을 부수고, 또 깨고 나오는 배우 박정민이 ‘그것만이 내 세상’에 이어 ‘변산’으로 상업 영화 주연 배우로 한 발을 내디뎠다. ‘그것만이 내 세상’은 누적관객수 340만명을 기록하며 손익분기점을 돌파했지만 ‘변산’은 누적관객수 48만명이란 다소 아쉬운 기록을 남기며 막을 내렸다.
배우 박정민은 “학수라는 인물을 우리가 주변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사람처럼 만들고 싶었다.”고 말했다.
박정민은 올 초 ‘그것만이 내 세상’(최성현 감독)을 완성하기 위해 하루에 5~6시간씩 6개월 동안 피아노 연주에 매달렸다고 한다. 이번 영화 ‘변산’(이준익 감독)에서는 래퍼라는 역할에 걸맞게 약 1년 가까이 랩을 갈고 닦은 것은 물론, 직접 랩을 작사하며 오로지 머리를 쥐어뜯는 나날을 보냈다고 한다. 이 모든 게 영화를 위해서였다. 무명 래퍼의 학수의 고뇌는 그렇게 영화에서 빛났다.
”쉽지 않죠. 제가 하는 노력에 따라 영화가 달라질 수 있다는 게, 부담이 된 것도 있지만 인물의 옷을 제대로 입고 싶었어요. 어쨌든 모든 랩들이 시나리오 정보 만으로는 쓸 수 없고, 제가 제일 많이 궁금해하고, 고민했던 인물인 학수잖아요. 제가 학수에 대한 전사를 만들어서 랩에 넣고 싶었어요. 결국 학수 입장에서 대본을 쓰는 것과 다름 없었죠. 그 과정은 물론 힘들었지만 그런 것들이 유기적으로 작용해서 학수를 연기할 때도 정말 도움이 많이 됐어요.“
박정민이 연기를 잘 하는 비법은 ‘자연스러움’에 있었다. 그의 표현을 빌리면, “힘을 빼고 마치 이 장면에 안 나오는 거처럼 연기하자”고 마음을 먹었단다.
“힘을 빼고 하려고 했어요. ‘그것만이 내 세상’ 땐 전작 ‘동주’ 보다 힘을 빼고 하려고 했고, ‘변산’ 땐 ‘그것만이 내 세상’ 때보다 더 힘을 빼려고 했어요. ‘힘을 뺀다’란 말엔 여러 가지 의미가 있지만 과한 표현을 안하려고 했어요. 대사를 하는 게 아닌, 우리끼리 말하듯이 하려고 했어요. 최대한 뭔가 안하려고 했죠. 사실 제가 계속 나오면, 관객들이 질릴 것 같은 부담도 있었어요. 매 신 마다 나오는 분량인데, 매번 힘줘서 보여준다면 그만 좀 나왔으면 하는 생각이 들 것 같아요. ”
영화 속에선, “내 고향은 폐향. 내 고향은 가난해서 보여줄 게 노을 밖에 없네” 란 대사가 등장한다. 박정민은 이 시 한편에 학수의 정서가 온전히 담겨 있다고 말했다.
“그 시를 처음 봤을 때, 학수의 정서가 느껴졌어요. 가난해서 보여줄 게 노을 밖에 없는 아이 .그 시를 읽다 보면, 학수의 그 어떤 것도 대입이 가능했어요. 학수는 사랑을 받아 본 적 없어서, 사랑을 줄 수 없었던 사람이잖아요.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엔 남은 게 없어요. 이 고향에 있던 유일한 가족이 없어진거죠. 그렇다고 아버지는 내 가족이 아니라고 생각했을텐데. 되게 쓸쓸하더라구요. ”
‘변산’의 매력은 현실적인 청춘들을 현실적으로 다루면서 웃음을 이끌어낸다는 점. 그렇다고 판타지스런 ‘행복한 웃음’으로 끝나지도 않는다. 박정민은 “오히려 짠한 느낌을 받으면서 극장을 나올 수 있어 좋았다”고 했다.
“학수가 선미(김고은)랑 결국 결혼식을 올리고, 그 전보다 성숙한 모습으로 살겠지만 마지막 장면들이 기분 좋게 ‘저 둘의 미래가 행복하겠다’는 느낌으로는 다가오지 않아요. 이 둘의 다음 이야기는 과연 행복할까요? 아닐 것 같아요. 계속 다투고 싸우겠죠. 학수가 랩으로 밥은 벌어먹고는 살 수 있을까. 여러 생각이 드는 거죠. 그렇다고 아버지랑 화해 못하고, 선미랑 결혼도 못하고 살았다면 어쩔 건대? 이 느낌이 있어요. 여러 반응들이 있을 수 있지만, ‘변산’의 그 현실적인 느낌이 좋아요.“
2011년 영화 ‘파수꾼’으로 데뷔한 박정민은 이준익 감독의 ‘동주’에서 송몽규로 분해 이름을 알렸다. 이후 ‘염력’, ‘그것만이 내 세상’에 출연했고 ‘사바하’, ‘사냥의 시간’ 촬영을 마쳤다. 8월부터는 ‘타짜3’ 촬영을 준비 중이다.그야말로 열일 행보다.
연이어 작품 활동을 이어가게 된 비결로 ‘동주’가 가져다 준 결과‘라고 전한 박정민은 대중의 부담과 기대감이 커다란 책임감으로 다가오기도 한다고 털어놓기도 했다. 이는 그의 신조인 ’남에게 폐 끼치지 말자‘에서도 엿볼 수 있다. 주연으로서 작품의 완성도를 높여야 한다는 책임감도 있지만, 그가 걱정하는 건 동료 배우나 스태프들에 대한 책임감이 컸다.
“점점 맡는 롤이 커지면서 같은 영화를 만드는 동료, 또 모든 사람에게 폐를 끼치지 말아야겠다는 그런 생각이 들어요. 남한테 폐 끼치지 않고 살고 싶고, 또 영화를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을 해요. 영화를 만드는 과정에서, 도드라지게 보이는 사람이 주연인데 그 사람의 연기, 태도, 홍보 활동이든 행여나 사소한 감정 하나 때문에, 많은 사람들에게 폐를 끼치는 일이 발생하기도 해요. 그런 일이 생기지 않길 바라는 마음에 더 신경 쓰고 노력하게 되는 것 같아요. 연기도 연기인데, 연기 외적으로 감당해야 하는 걸 체감하면서, 10년 넘게 20년 가까이 해오는 선배분들이 너무 존경스러워요.”
배우 박정민은 “문근영과 투톱 주연으로 나선 연극 ‘로미오와 줄리엣’을 중극장에서 하면서 정말 힘들었다” 며 “다음에는 작은 극장에서 작게 하고 싶다”고 말했다.
배우 박정민은 이준익 감독은 “배우들이 편하게 편하게, 역량을 발휘하는 게 있게 해주시는 고마운 분이다”고 했다.
2016년 산문집 ‘쓸 만한 인간’을 낸 그는 요즘은 글을 쓰지 않는다고 했다. “지금은 쓸 말이 없고 하고 싶은 말이 없다”고 덤덤히 말을 이어가던 박정민은 “감히 절필은 아니다”고 손사래를 쳤다.
“글 쓰는 일이 주업이 아닌데, 일처럼 느껴지는 순간이 확 오더라구요. 게다가 웃기는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 글을 쓰기 시작 한 건데, 이젠 제가 쓸 말이 없더라구요. B급 병맛 코드 글이라 멋있거나 잘 쓰지도 못해요. 가끔은 제 책을 읽은 분들이 박정민이란 사람을 잘 안다는 느낌을 받을 때가 있어요. 요즘 관객 분들이 글과 연기를 따로 떼어 보는 능력이 있어서 영화 보는 데 무리가 없다는 것도 아는데, 괜한 이미지 하나를 만들어버린다는 게 배우에겐 썩 좋지 않겠구나란 생각도 들었어요. 그래서 나중에 글을 쓰게 된다면, 제 이름 없이 써볼까도 조금씩 생각중입니다. ”
박정민은 ‘노을’ 같은 배우였다. 한마디로 ‘아름답고 슬픈 느낌이 동시에 드는 배우’이다. 영화 ‘변산’에서 오감을 자극하는 노을이 아스라이 번지면서 세상의 소란을 감싸 안는 바람소리가 들리고, 비릿한 바다 냄새가 올라오면서 오감을 흔드는 감흥은 인터뷰 내내 그에게서 번져 나왔다.
그가 가장 좋아하는 장소는 영화 촬영장이 아닌 공항이었다. 경계선에 서 있는 이들이 느끼는 설렘과 행복, 아련함이 그대로 전해졌다.
“노을을 보면서 느끼는 감정을 전 공항에서 많이 느껴요. 공항을 좋아해서 4시간 전에 일찍 도착해요. 면세점에 가는 것도 아니고, 그냥 공황에 눌러 앉아있는거죠. 가만히 앉아서 커피 마시고, 담배피고, 밥도 먹고, 책도 보면서 시간을 보내요. 그 느낌이 진짜 말 그대로 예쁘고, 슬프고, 슬프면서도 행복하고, 행복하면서도 아련한 감정이 들어요. ”
활주로 입구에 서면 여러 가지 생각이 들죠. 일찍 일어나는 게 싫어서, 해질녘에 비행기를 많이 타고 가는 편인데, 그럴 때마다 보면, 딱 그 감정인 것 같아요. 뭔가 떠난다는 설렘도 있는데, 가슴 한 구석에 아련함도 있잖아요. 제 글에서 쓴 적이 있었나. 경계선에 서 있다는 느낌을 좋아하나 봐요. 공항에서 느끼는 그 경계선의 감흥이 지금의 제 심정일까요. “
/정다훈기자 sestar@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