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수해양경찰서 경비함정 117정 대원들이 지난 5월 해상종합훈련에서 해상사격훈련을 하고 있다. /사진제공=여수해양경찰서
‘비의 신’이라는 태풍 ‘쁘라삐룬’이 지나가고 모처럼 평온해진 지난 12일 오후1시 여수 앞바다. 장태익 정장(경감)과 대원들이 여수해양경찰서 전용 부두에서 ‘움직이는 바다 파출소’로 불리는 100톤급 경비함정 117정의 출항을 앞두고 분주히 움직이고 있었다. “출항요원들 안전교육 실시 후 배치 붙어!”라는 박금천 부장(경위)의 명령이 하달되자 엔진에 시동이 걸리고 함정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파도가 없는 날이었는데도 손잡이를 잡지 않으면 넘어질 정도로 흔들렸다. 장 정장은 “이렇게 바다가 조용한 날은 찾아보기 힘들다”며 “날씨가 안 좋을 때는 선박 외부의 화장실에도 가지 못한다”고 전했다.
100톤급 함정이라고 하면 얼핏 꽤 큰 배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실제로는 약간 큰 어선 정도의 크기다. 경비함정에는 50중기(12.74㎜) 1문과 고속단정 등 중장비가 빼곡히 채워져 있어 탑승인원 15명이 선내에서 이동하려면 서로 자리를 비켜줘야 할 만큼 비좁다. 게다가 여수서 117정은 20년이 넘은 노후 함정이다. 성인 남성 1명이 발을 제대로 뻗을 수 없을 정도의 비좁은 2층 목제침대, ‘쿵쿵’거리며 계속해서 귀를 찌르는 엔진 소리가 대원들의 3박4일 항해를 더욱 고단하게 한다. 6개월째 117정에서 군 복무 중인 나현수 일경은 “우리 함정은 20년이 넘은 노후 함정이라 함정 내 공기가 좋지 않아 대원들이 힘들어한다”며 “곳곳에 노후한 내부 시설물의 수리도 자주 해야 하고 침실 천장에서 물이 샐 때도 있었다”고 토로했다.
서필석(뒤쪽) 경사와 이형규 상경이 경비함정 117정 제어실에서 엔진룸을 점검하고 있다. /여수=강광우기자
함정 아래에 있는 엔진룸에 들어가 보니 고막이 찢어질 듯한 굉음이 들렸다. 귀마개를 하고도 귀가 얼얼했다. 엔진룸에서 만난 서필석 경사는 큰 소리로 “함정이 순찰하는 동안 교대로 이 엔진룸을 지켜야 하는데 워낙 소음이 커 배에서 내려 육지로 돌아가면 이명이 들릴 정도”라며 “제어실 대원들 중 청력에 문제가 생기는 경우가 꽤 많다”고 전했다.
117정의 관할 구역은 나로도와 소리도·간여암을 잇는 여수 앞바다 1,850㎢에 달한다. 서울시 면적의 3배다. 한 번 출항하면 3박4일 동안 임무를 수행한다. 해경은 육지 경찰보다 업무 범위도 넓다. 일반 경비업무를 비롯해 화재·전복 등 안전사고가 발생하면 즉각 구조에 나서야 한다. 기름 유출 등 해양 오염 사고가 터지면 오염 방제 업무도 해경의 몫이다. 육지의 경찰과 소방대원들이 하는 일을 동시에 하는 격이다.
출항 후 한 시간가량 달려 도착한 곳은 금오수도 해역. 이곳에는 30척이 넘는 낚시 어선들이 밀집해 있었다. 주말에는 100척이 넘을 정도로 많은 사람이 찾다 보니 사고도 잦다고 한다. 대원들은 117정이 멈춰 서자 함정 뒤쪽에 있는 도르래를 손으로 일일이 돌려가며 고속단정(고무보트)을 바다로 내리기 시작했다. 의경 5명이 달라붙어 10여분 씨름한 끝에 비로소 고속단정이 바다에 안착했다. 박경륜 안전팀장(경사)은 “날씨가 좋지 않으면 배가 이리저리 흔들리는데 수동으로 단정을 내리고 파도가 높게 치는 바다로 나가려면 우리도 무서운 것이 사실”이라면서도 “하지만 인명사고가 난 곳이면 어디든 반드시 달려간다”고 미소 지었다. 음주운전·불법조업 등을 단속하기 위해 고속단정이 낚싯배 무리로 다가가자 낚시꾼들의 눈총이 따갑다. 한 낚시꾼은 음주단속을 하는 박 팀장에게 “물고기 두 마리 놓쳤으니 잡아놓고 가라”고 핀잔을 주기도 했다.
박금천(왼쪽) 여수해양경찰서 부장(경위)이 경비함정 117정에서 현장 경비 업무에 나서는 대원들에게 지시를 내리고 있다. /여수=강광우기자
117정은 다시 항해를 시작해 한 시간을 더 달려 여수해만에 도착했다. 바다 곳곳에 정박한 대형 상선들이 급유를 하고 있었다. 항구에 배를 댈 자리가 없거나 항구 이용비용을 아끼려고 바다 한가운데에서 급유를 하는 경우다. 117정은 대형 상선들 사이를 돌아다니며 급유 과정을 체크했다. 바다에서 급유할 때 자칫 사고가 발생하면 대형 오염 사건으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조금 더 나가니 GS칼텍스 여수공장이 나타났다. 큰 유조선이 공장의 급유관 옆에 정박한 채 빨간 깃발을 흔들며 원유를 이송하고 있었다. 빨간 깃발을 올린 것은 ‘급유 중’이라는 신호다. 대원들의 눈이 한층 매서워졌다. 2014년 1월 이곳에서 16만4,000톤급 유조선이 무리한 접안을 시도하다 송유관이 파손돼 800~900㎘의 기름이 바다로 유출되는 대형 사고가 터진 적이 있기 때문이다. 박 팀장은 “대형 유조선에서 기름 유출 사고가 발생하면 2~3개월은 집에 못 들어간다”며 “사고가 나기 전 미리미리 꼼꼼히 대비하는 것이 최선”이라고 귀띔했다.
20년이 넘은 노후 함정에서 발도 제대로 뻗지 못하고 잠을 잘 정도로 열악한 환경이지만 기자가 직접 만난 117정 대원들은 불편함을 밀어낼 만한 사명감에 가득 차 있었다. 마효득 행정팀장(순경)은 “첫 근무지를 여수로 발령받고 왔을 때 생각보다 열악한 근무 환경에 놀랐다”면서도 “국민의 눈높이에 맞춰 다양한 임무를 완벽히 수행하고 있는 함정 식구들이 자랑스럽다”고 말했다.
다만 대원들의 사명감과 사기에만 의존해 빈발하는 해양 사고에 대비하기에는 역부족이라는 목소리가 높다. 실제로 해경은 117정 같은 100톤급 경비함정 26척을 보유하고 있지만 16척이 사용한 지 20년이 지난 노후 함정이다. 해경의 한 관계자는 “노후화한 100톤급의 대체 건조를 위해 예산 반영을 요구하고 있지만 당장 눈에 띄는 것이 아니라 밀리기 일쑤”라며 “갈수록 늘어나는 해상 임무를 잘 수행하려면 투자가 반드시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여수=강광우기자 pressk@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