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혁림 ‘통영항’. 화가가 91세이던 2006년에 그린 255.6x602.6cm의 대작으로 노무현 전 대통령의 요청으로 제작돼 청와대가 소장하고 있다. /사진제공=청와대
바다는 꿈을 꾸게 한다. 연일 된더위가 수은주 최고치를 찍는 요즘, 일터에 종일 매인 직장인은 시원한 바닷바람을 떠올리며 휴가를 꿈꾼다. 파도 넘실대는 푸른 바다는 피서객의 백일몽인 동시에 어부의 부푼 꿈이다. 누군가에게는 화려한 외출이며, 어떤 이에게는 그리운 고향인 바다. 화가는 이 바다 앞에서 “저 멀리 스칸디나비아, 지중해 혹은 알래스카로부터 밀려온 파도가 아닌가” 생각하며 드넓은 세계를 바라봤다. 그리고, 섬 속 산 중턱 사찰에서 공부하던 한 사법고시생은 이 바다를 보며 ‘사람 사는 세상’을 꿈꿨다.
시퍼런 바다색이 눈에서부터 더위를 날려주는 전혁림(1915~2010)의 ‘통영항’이다. 경남 통영에서 나고 자라 말년에도 여기서 그림만 그리다 눈감은 그에게는 모든 것이 푸른 세상이었다. 그림에서 깊은 바닷물을 길어온 듯한 울트라마린부터 코발트블루, 하늘을 끌어다 놓은 듯한 파란 옥색의 세룰리안블루까지 눈부시게 넘실댄다. 통영항 너머로 내다보이는 미륵산이 바다에서 솟은 양 그림 한가운데를 차지했다. 그 오른쪽의 아치형 다리가 관광특구 미륵도와 통영 내륙을 연결하는 운하교인데, 그 아래로 해저터널이 지난다. 그림 앞쪽으로 작게 솟은 남망산은 해발 80m의 야트막한 산이라 그런지 좀 작다. 그 둘 사이로 올망졸망 다도해가 펼쳐진다. 영주산 산허리 길을 따라 올라서서 선조가 충무공 이순신의 공을 치하하며 세운 국보 제305호 세병관 뒤쪽 부근에 서면 실제로 이런 통영항을 볼 수 있다.
하지만 그림 왼쪽에 나란히 놓인 통영·거제 간 거제대교와 신거제대교, 오른편 위쪽으로 무지개같이 굽은 삼천포대교 다섯 다리 중 하나인 초양대교에는 작가적 상상이 가미됐다. 화가의 발은 땅을 딛고 섰되 그의 눈은 한려수도 곳곳을 누비는 갈매기처럼 높이 날아올라 멀리 내다봤다. 안평대군의 꿈을 그린 안견의 ‘몽유도원도’나 꿈에서도 다시 보고 싶다며 겸재 정선이 그린 ‘금강전도’도 그랬다. 한 자리에서 보고 그린 풍경화가 아니다. 정면을 묘사하나 싶다가도 산 뒤의 보이지 않는 부분까지 넘어다보며 그린 기법을 부감시(俯瞰視)라고 한다. 서양화의 단일시점 투시도법과 달리 여러 시점을 동시에 한 화폭에 담는 ‘다시점 기법’이다. 시선을 자유자재로 바꿔가며 풍경을 두루 훑는다는 뜻이다. ‘큐비즘(Cubism)’도 동일한 사물의 서로 다른 측면을 쪼개듯 여러 시점에서 살펴 본질을 파악하고자 했다. 전혁림이 조형성에서는 ‘한국의 피카소’요, 색채에서는 ‘한국의 마티스’라 불리던 이유다. 통영항에서 바다 건너 남해, 삼천포, 거제까지 잡아당긴 전혁림의 시선이 비범하다. 함축적인 풍경에 한려수도의 경관을 다 담고자 했다. 실제 풍경을 근거로 했으나 실경(實景)을 그렸다기보다는 마음을 따라 그린 심경(心景)이라 할 만하다.
전혁림 ‘화조도’. 1954년작으로 꽃과 새의 형상이 거의 추상화처럼 표현된 수작이다. /사진제공=국립현대미술관
품에 안길듯한 통영항 여기저기에 정박한 고깃배가 정겹다. 따개비처럼 다닥다닥 기댄 집들은 그곳에 사는 인심 좋은 사람들을 느끼게 한다. 전혁림은 1915년 이런 항구도시에서 태어났다. “막연하나마 세계적으로 이름을 떨칠 것이라는 꿈”을 어려서부터 품었다. 처음에는 문학 소년이었다. 하지만 우리말 생각을 일본 글자로 적고 그걸 다시 영어든 제3의 외국어로 번역해야 한다면 나중에는 글이 너덜너덜해질 것만 같았다. 문학의 꿈을 접었다. 언어의 장벽 없이 걸러지지 않고 바로 뜻을 전할 수 있는 것은 그림뿐이라는 생각에 이르렀다. 무역업을 하던 형님이 외국에서 컬러판 도록과 잡지를 사다 줘 독학으로 그림을 공부했다. 대학 입시를 앞두고 심한 골절상을 당해 1년여를 병석에 누워 지냈고 집안 사정도 갑자기 기울어 통영수산전문학교로 진학했다. 뱃멀미 심하고 피부도 바닷물 알레르기가 있는지라 어부가 될 생각은 처음부터 없었다. 만날 화구를 메고 등교했다.
지금의 국민은행 전신인 ‘금융조합’에 취직했다. 5년간 근무하며 줄곧 그림 그리고 꼬박꼬박 저축해 파리 유학을 준비했다. 한국화단에 막 소개된 서양화풍에 일본 영향이 깊은 것이 못마땅했다. 그래서 프랑스를 택했고, 거기서는 밥 대신 빵을 먹어야 한다며 5년간 매일 한 끼 이상은 빵으로 상을 차렸다. 굳이 연습까지 할 일은 아니었지만 빵을 뜯어 물며 꿈을 되새겼다. 그러다 광복을 맞았다. 감격에 들떠 억눌렸던 예술혼을 불태우고자 의기투합했다. 시인 유치환·김춘수, 시조시인 김상옥, 작곡가 윤이상 등과 함께 ‘통영문화협회’를 창립했다. 그 바람에 유학의 때를 놓치고 말았지만 가히 젊은 시절의 황금기였다. 6·25 전쟁 발발로 부산으로 피난을 떠났고 당시 밀려 내려온 예술인들의 아지트 같았던 다방 ‘밀다원’에서 첫 개인전을 열었다. 1953년 제2회 국전(國展)에서 ‘늪’을 출품해 문교부장관상을 받으며 주목받았지만 학맥 등에 휘둘리는 미술계 정치놀음이 싫어 고향으로 돌아왔다.
전혁림 ‘한국풍물도’. 2001년작으로 오방색을 근간으로 한 민화적 화풍이 돋보인다. /사진제공=국립현대미술관
인생은 확실히 새옹지마다. 1979년에 당시 국내 유일의 미술전문잡지에서 ‘과소평가된 화가’를 발굴한 기획기사가 계기였다. 천리길 통영까지 찾아오는 이들이 많아졌다. 환갑 넘긴 화가가 제2의 전성기를 맞았다. 통영 외곽에 거대한 비닐하우스 같은 작업실을 마련했고 화가는 매일 붓을 들었다. 2002년에는 국립현대미술관의 ‘올해의 작가’로 선정돼 대규모 회고전이 열렸다. 2005년 11월 경기도 용인에 위치한 이영미술관이 신작들로 ‘구십, 아직은 젊다’ 전을 열었다. 노무현 대통령이 아침 방송으로 그 전시 기사를 접한 것은 우연이었고, 버스로 전시장을 찾은 것도 즉흥적이었다.
이 ‘통영항’은 고(故) 노무현 전 대통령이 재임 시절 구입해 유명세를 탔다. 화백과 대통령은 일면식도 없는 사이였다. 전혁림이 잠시 교편을 잡았던 시절 가르친 제자가 법조인과 결혼했는데, 부산 근무 시절에 가끔 찾아오던 인권변호사가 바로 노 전 대통령이었다. 집에 걸린 그림이 묘하게 마음을 끈다며 이름을 물었다. 수십 년 후 아침 방송에서 ‘전혁림’의 이름을 다시 들었고 여전히 작품활동을 한다는 게 놀라워 당장 전시장으로 갔다고 했다. 전시를 본 노 전 대통령은 ‘한려수도’라는 작품을 원했다. 고시생으로 통영 미래사라는 절에 있을 때 봤던 풍경과 비슷하다고 했다. 추억으로 존재하던 풍광을 다시 만난 것. 하지만 그 작품은 너무 커서 청와대에 걸기 어려웠다. 다시 그려주기를 요청했고 그렇게 ‘통영항’이 탄생했다. 2006년 3월 그림은 청와대 본관 인왕실에 걸렸다. 하지만 뒤이어 청와대 주인이 된 이명박 전 대통령이 그림을 치우는 바람에 문재인 대통령이 취임하기 전까지 그림은 수장고에 숨죽여 있었다. 취임한 문 대통령이 비서실장 시절 자주 보던 그림의 안부를 물었다. 먼지 둘러쓴 그림은 다시 빛을 봤다. 훼손 부분을 복원한 후 최근에는 청와대 사랑채 특별전 ‘함께,보다’에 선보였다.
전혁림 ‘백락병’. 2001년작으로 십장생,해,등잔,새 등 복을 주는 백 가지 사물을 담고 있다. /사진제공=국립현대미술관
전혁림이 생전에 작업실로 사용했던 통영의 옛집은 전혁림미술관이 됐다. 아버지에 이어 화가가 된 전영근 관장이 이끌고 있다. 요즘 같은 한여름에는 지중해인 듯 착각할 정도로 이국적 풍취가 짙다. 서울에서는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의 기획전 ‘내가 사랑한 미술관’에서 1954년작 ‘화조도’를 감상할 수 있다. 작가는 생전에 우리 ‘민화’의 가치를 부르짖었다. 우리 미술이 수묵 문인화 중심의 ‘백색미학’으로 평가되는 것을 안타까워 다. 특히 서민들의 애환을 화면에 담아 공감을 얻은 민화(民畵)에서 화면 구성법이나 색채 사용, 시대정신을 배웠다고 했다. 색동저고리 같고 단청 같은 오방색이 등장하는 ‘풍물도’ 연작은 그런 전혁림의 대표작이다. 작곡가 윤이상이 서양음계에 우리 전통음악의 궁상각치우를 접목해 독창적인 교향곡을 만들어 천재 소리를 들었듯, 그의 벗이자 동지였던 전혁림은 서양화 기법에 전통 민화의 모티브와 그 정신을 녹여 자신만의 화풍을 개척했다. 2000년 부산시청의 로비 벽화를 위해 제작된 가로 27m 대작 ‘한국의 풍물’이나 국렵현대미술관이 소장한 2001년작 ‘백락병’도 눈여겨볼 작품들이다. 조선 중기의 김홍도는 중국식 정물화가 아닌 자신만의 고유한 양식으로 ‘책가도’를 고안했다. 그 뒤를 이은 장승업은 귀한 물건들을 차곡차곡 나열하는 ‘기명절지도’를 이뤘다. 둘의 공통점은 복을 부르는 상징물과 선비의 책장에서 나온 각종 진귀한 정물들을 다룬다는 것. 전혁림은 이를 현대미술로 이어냈다. ‘백락병’은 ‘즐거움(樂)을 주는 백(百) 가지 사물’이라는 뜻으로 그림 안에 해와 달을 비롯해 거북이, 영지 등 십장생 등이 노닌다.
전혁림은 자신만의 현미경을 가지고 자기만의 망원경을 쥐고 세상을 봤다. 그대, 무슨 꿈을 꾸고 있는가.
/조상인기자 ccsi@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