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기요금 누진제’ 개편 논란이 일고 있는 가운데 지난 10일 오후 서울 용산구의 한 다가구 주택에 사는 한 시민이 전력 계량기를 바라보고 있다./연합뉴스
사상 최악의 폭염으로 가정의 에어컨 사용이 늘면서 전기요금 누진제를 완화하거나 폐지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전기요금 누진제는 1973년 석유파동으로 에너지 절약의 필요성이 제기됨에 따라 이듬해 12월 주택용에 한해 도입된 제도다. 도입 당시 누진 단계는 3단계, 누진율은 1.6배였지만, 2차 석유파동으로 1979년 12단계, 19.7배로 강화된 이후 완화와 강화를 거듭하다 지난 2016년 3단계, 3배 수준으로 완화됐다.
누진제 완화나 폐지에 반대하는 이들은 누진제를 풀게 되면 가정의 전력 과소비를 부추겨 전력 수급 불안을 초래할 수 있다고 우려한다. 전기를 적게 쓰는 저소득층의 요금을 인상해 전기를 많이 쓰는 고소득층의 요금을 깎아주는 ‘부자 감세’ 구조가 될 수 있다는 것도 이들의 주장이다. 누진제를 완화하거나 폐지하려면 전기를 가장 적게 소비하는 1단계 구간의 요금을 올릴 수밖에 없는 탓이다.
이 같은 논리는 소득이 적은 가구일수록 전기를 적게 소비하고 소득이 많은 가구일수록 전기를 많이 소비한다는 가정에 입각했다.
하지만 전기를 실제로 적게 소비하는 이유가 소득 수준이 낮기 때문일 수도 있지만 소득과 상관없이 식구 수가 적기 때문일 수도 있으며, 저소득층이라도 식구 수가 많으면 전기 소비량이 많아질 수 있기 때문에 누진제가 반드시 저소득층에게 유리한 제도는 아니라는 비판이 나온다.
국회예산정책처가 ‘공공기관 요금체계 평가’(전수연, 2016) 보고서에서 소득 수준과 가구 규모별 전기요금 지출을 비교한 것을 보면 가구 소득과 전기 소비가 반드시 비례하지 않는다는 것이 확인 가능하다.
통계청의 2014년 가계동향조사를 바탕으로 한 분석에 의하면 소득 하위 20%인 1분위에 속하면서 5인 이상인 가구의 월평균 전기요금은 5만8,071원으로 소득 상위 20%(5분위)인 1인 가구의 월평균 전기요금(4만1,753원)을 상회했다.
소득 수준이 높지만 전기 소비량이 적은 1인 가구에 누진제가 유리하게 작용하고, 소득이 낮더라도 식구 수가 많을 경우 누진제가 불리하게 작용하는 것이 확인되는 대목이다.
보고서에 따르면 전기를 적게 쓰는 가구일수록 저소득층이라는 공식은 4인 이상 가구에서는 적용되지 않았다는 것도 알 수 있다. 4인 가구 중 소득이 가장 적은 1분위 가구의 월 전기요금은 5만4,339원으로 2분위(하위 21~40%, 4만5,804원)나 3분위(상위 41~60%, 4만6,592원)에 비해 오히려 많았고, 5인 이상 가구에서도 1분위 가구가 지출하는 전기요금(5만8,071원)이 2분위(5만2,491원)와 3분위(5만6,016원)를 상회했다. 이는 저소득층 가구에서 난방을 전기에 의존하는 경우가 있기 때문인 것으로 보고서는 추정했다.
2016년 12월 누진제 완화 이후 전력 소비량 변화를 살펴보면 누진제 완화가 당장 과소비를 부추기지는 않을 것으로 내다봤다.
한국전력통계에 따르면 2017년 주택용 전기요금 단가는 누진제 완화의 영향으로 kWh당 121.52원에서 108.50원으로 하락했지만, 주택용 전력 판매량은 총 6,854만3,760MWh로 전년도에 비해 0.7% 증가하는 데 그쳤다.
이는 2016년 증가율(3.7%)에 비해 오히려 낮아진 수치로, 2014년(-2.06%) 이후 3년 만에 최저치다. 산업용(2.5%)과 일반용(2.4%), 교육용(2.9%) 등 다른 용도의 전력 판매량 증가율에 비해서도 낮다.
12단계 19.7배였던 누진제가 4단계 4.2배로 완화돼 적용된 1989년에도 가정용 전력소비 증가율이 14.8%를 기록, 전년도 증가율(15.2%)에 못미친 바가 있다.
누진제가 전력소비 억제 기능이 있다는 점을 인정하더라도 주택용 요금 누진제를 통해 가정의 전력소비를 조절해 전체 전력수요를 관리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다는 입장도 있다. 주택용 전력이 전체 전력소비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매우 낮고 전체 전력수요가 최대치에 달하는 시간대와 주택용 전력의 피크 시점도 상이하기 때문이다.
전력거래소와 한국전력 등의 자료를 보면 여름철 전체 전력수요는 오후 2~3시 혹은 오후 4~5시에 최대치에 도달하는 반면, 주택용에서는 주로 오후 8~10시에 최대치에 도달한다. 또 작년 전체 전력 판매량 중 주택용의 비중은 13.4%에 그쳤고, 산업용과 일반용이 각각 56.3%, 21.9%로 대부분을 차지했다.
우리나라는 1인당 전기 소비량이 많은 것으로 알려졌지만, 가정의 전기 소비량은 적은 편이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통계에 따르면 우리나라의 인구 1인당 주택용 전력 사용량(2013년 기준)은 1,0274kWh로 OECD 평균(2,341kWh)의 2분의 1 수준에 불과했다. 반면 산업용 전력 소비량은 인구 1인당 5,092kWh로 OECD 평균(2,362kWh)의 2.2배에 이르렀다. /이서영인턴기자 shyung@sedaily.com